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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9ocfe_m6XoM

 

  지금은 불륜이라고 하면 덮어두고 욕부터 하는 시대가 되었지만, 오직 ‘불륜’만이 사랑의 지위를 차지했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자유연애 사상이 이 땅에 들어서기 시작했던 1920년대, 수많은 남녀가 사랑을 위해 목숨을 던졌습니다. 그들은 모두 불륜이었습니다. 이미 부인과 남편이 있었기 때문이죠. 그들은 기존의 가부장적 유교 질서를 벗어나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연애하고 결혼하고자 했습니다. 극작가 김우진과 조선 최초의 소프라노 윤심덕 또한 자유롭게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그들의 사랑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자유로운 연애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죠. 사랑의 불멸성을 증명하려 했던 것일까요? 결국 그들은 자신들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 함께 현해탄에 몸을 던집니다. 오늘은 자유연애 사상과 관련하여 김우진과 윤심덕의 사랑 이야기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혹시 아직 전편을 보지 않으신 분이 있다면, 위에 카드를 눌러 보고 오시면 이해하시는 데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합니다.

 

  김우진과 윤심덕은 1921년 동경 유학생 서클이었던 ‘동우회 순례 극단’에서 처음 만납니다. 그러나 우리의 기대처럼 둘이 첫눈에 반해 서로 사랑에 빠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당시 김우진이 일본인 간호사와 교제하고 있기도 했고, 성격이 워낙 상극이었기 때문이죠. 심덕은 별명이 ‘왈녀(왈가닥 소녀)’였는데, 남자 같다는 말을 자주 들을 만큼 활달하고 대범한 여자였습니다. 이를 잘 보여주는 일화가 하나 있는데요, 심덕은 동우회 극단 활동 중 어느 날 부산의 한 여관에서 동료 남성과 한방에서 자게 됩니다. 그날 밤 이 남자가 흑심을 품고 다가오자 뺨을 후려치며 “나는 네가 그 같은 더러운 남자인 줄을 모르고 가깝게 사귀어 왔더니 이것이 무슨 금수의 행동이냐”라고 했다고 합니다. 남자는 즉시 사과를 했고 심덕은 또 이를 너그럽게 용서해주었다고 합니다. 그리고선 다음 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 친구와 쾌활하게 웃고 떠들었다고 하는데요, 그만큼 화끈한 여자였습니다. 반면 김우진은 신중하고 차분한 성격이었는데 그래서 처음에는 서로 잘 맞지 않았습니다. 우진은 목포 대지주 김성규의 장남으로 원래 집에서는 농업을 공부하기 바랐지만, 문학을 사랑하여 와세다대 영문과로 진학해 극단 활동을 했습니다. 둘은 이때 만나 순례 극단 활동으로 두 달여 동안 동고동락하면서 가까운 사이가 되었습니다. 조선 각지를 돌며 강연과 문화 활동을 했는데, 그 과정에서 외롭고 상처받은 이 두 영혼은 서로의 문학과 예술 그리고 민족에 대한 애정을 확인하게 됩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연인 관계는 아니었는데요, 동우회 활동을 마치고 심덕이 우진의 하숙집을 찾아와 적극적인 구애를 하기 시작하면서 연인으로 발전했습니다. 아, 김우진은 동경으로 유학 오기 전 이미 결혼해 부인이 있었습니다. 물론 당시 모든 사람이 그러했듯이 사랑해서가 아니라, 집안끼리 어렸을 때 시킨 것이었긴 하지만요.

 

  1922년 김우진은 윤심덕에게 동생들과 함께 목포로 와서 가족 음악회를 열어 줄 것을 부탁하는데요, 이 음악회를 계기로 둘의 사이는 더욱 가까워집니다. 윤심덕의 여동생 윤성덕은 이화학당에서 피아노를 전공했고, 남동생 윤기성은 연희전문에서 성악을 전공했습니다. 음악가 집안이었죠, 그런데 집은 너무나 가난했습니다. 1923년 6월 동아 부인상회 창립 3주년 기념 음악회에서 초청 가수로 무대에 서면서 조선 최초의 소프라노 가수로 멋지게 데뷔했지만, 수입은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지기에는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심덕은 남동생 미국 유학비도 마련하고 가난한 집안을 일으키기 위해 돈이 안 되는 성악을 잠시 접어두고 대중가요를 부르기 시작합니다. 그래도 집안 형편이 나아지지 않자, 부모님은 심덕을 좋은 집안에 시집보내려고 합니다. 결국 부모님의 강요로 재력도 있고 집안도 좋은 함경남도 출신의 ‘김홍기’와 약혼하게 됩니다. 심덕은 김우진에게 이를 알리고 김우진의 마음을 확인하고자 했습니다. 우진은 그런 심덕에게 자신의 사랑을 확인시켜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심덕은 곧바로 ‘김홍기’를 찾아가 혼담을 없던 일로 해버립니다. 그러던 중 부호였던 ‘이용문’과의 스캔들이 터지는데요, 이용문에게 몸을 팔아 동생 유학비를 만들었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이로 인해 하루아침에 심덕은 음악계에서 없는 사람 취급을 당합니다. 심덕은 화제의 인물인 만큼 이것 말고도 스캔들이 굉장히 많았었는데요, ‘봉선화’로 유명한 작곡가 ‘홍난파’와도 열애설이 있었고, 유학 시절엔 화가 ‘박정식’과도 스캔들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박정식’은 심덕을 쫓아다니다가 거절당하자 정신 이상을 앓다가 죽기까지 했다고 하는데요, 이러한 스캔들과 추문은 어찌 보면 수많은 남성들로부터 관심과 질투를 받았던 당시 신여성의 숙명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이용문과의 추문으로 상처투성이가 된 심덕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은 것은 역시 우진이었습니다. 일이 끊겨 생계가 위험해진 심덕에게 우진은 연극 단체 ‘토월회’에 입단을 권합니다. 당시 여배우는 기생과 마찬가지 취급을 받았기에 어머니가 극구 말렸지만, 가출까지 하면서 입단하게 됩니다. ‘동도’라는 연극의 여주인공 ‘연실’을 맡아 공연을 했지만 크게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습니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실패했다고 봐야겠습니다. 딱딱한 연기, 서투른 말씨, 조그만 무대에 어울리지 않는 큰 키 때문에 심덕은 혹평을 받고 흥행도 실패합니다. 이후 전공을 살려 오페라도 도전했지만, 이것도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심덕은 세상의 비난과 혹평으로 인해 만신창이가 되었고, 김우진과의 사랑도 이루어질 수 없게만 느껴져 절망하고 있었습니다.

 

  우진은 당시 아버지의 강요로 상성합명회사 사장으로 있었는데요, 그러면서도 집필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우진의 작품은 문단에서 높이 평가받았는데요, 특히 비평에서 두각을 드러냈습니다. 그러나 우진의 그런 문학 활동은 아버지와의 갈등을 증폭시킬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심덕과의 관계를 알게 되면서 김우진을 더욱 옥죄었는데요, 우진은 참다못해 결국 출가를 결심하고 1926년 6월경 도쿄로 건너갑니다. 물론 이때 윤심덕과 동반 자살을 계획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윤심덕은 당시 미국 유학을 가는 여동생을 배웅할 겸 계약된 일본 음반회사에서 녹음을 하기 위해 오사카로 갔습니다. 동생 윤성덕이 피아노 반주를 맡아 음반을 녹음했는데요, 그중 하나가 그 유명한 ‘사의 찬미’입니다. 원래 예정에는 없던 노랜데 심덕이 간청해 녹음하게 됐다고 합니다. 참고로 이 노래는 루마니아 작곡가 ‘이바노비치’의 ‘도나우 강의 잔물결’에 심덕이 직접 쓴 가사로 부른 노래입니다. 녹음을 마치고 동생을 배웅하면서 “큰 성공을 하기까지 간 곳을 알리지 않을 테니 절대로 나를 찾지 말아라.”라고 했다고 하는데, 이때부터 자살을 결심했던 걸까요? 동생을 보내고 곧바로 도쿄에 있는 김우진에게 지금 당장 오지 않으면 자살하겠다고 전보를 보냅니다. 깜짝 놀란 우진은 곧장 달려옵니다. 둘은 그렇게 시모노세키에서 부산으로 가는 관부 연락선에 오르는데요, 그날 새벽 4시경 함께 현해탄에 몸을 던집니다. 팁 5원과 짐을 집으로 보내 달라는 쪽지만 남긴 채 말입니다. 이때가 1926년 8월 4일이었는데요, 언론에서는 조선 사람의 연락선 정사는 이번이 처음이라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둘의 정사가 화제가 되면서 ‘사의 찬미’는 10만 장이라는 당시로써는 천문학적인 판매량을 기록합니다. 이탈리아에서 악기점을 하며 살고 있다는 소문도 돌았지만, 이탈리아 주재 일본영사관에 확인해본 결과 헛소문임이 밝혀졌습니다. 또한 일본 레코드 회사로부터 3만 원을 받고 가짜 정사 연극을 했다는 설도 있고, 노이즈 마케팅을 노리고 레코드 회사 사장이 죽였다는 설도 있습니다. 흥미롭긴 하지만 이러한 설들은 당시 이 사건이 얼마나 센세이셔널했는지를 반증하는 것들이라고 보아야 하겠습니다.

 

  자신들의 사랑을 허락하지 않는 세상에 대한 원망과 분노 때문이었을까요? 아니면 정말 자신들의 사랑을 영원 속에 담기 위한 낭만적 선택이었을까요? 그들의 속내는 알 수 없지만, 이것만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사랑을 지키기 위한 결단이었다는 것 말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꽤 성공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들의 바람처럼 그들의 사랑은 가장 아름다울 때, 가장 절정일 때로 기억되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100년 뒤, 200년 뒤에도 지금처럼 회자 될 것이기에, 영원성을 확보했다고도 볼 수 있겠죠. 그렇게 그들의 결단은 그들의 사랑을 아름답고 예쁘게, 그리고 영원하게 만들었습니다. 지금 보면 너무나 무모해 보이지만 두 사람의 결단은 지금 우리 시대에 많은 것을 시사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너무나 쉽게 포기하고 타협해버리는 우리 시대의 사랑, 그리고 결혼은 현실이라며, 사랑이 밥 먹여 주냐며 너무나 쉽게 현실적 조건을 따라가는 우리들을 만약 이 두 사람이 다시 살아나서 보게 된다면, 무슨 말을 했을까요? 100년이나 지났는데도 변한 게 없냐며 놀라지 않을까요? 그래서 ‘자유연애 사상’은 여전히 진행 중인 ‘혁명’이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오늘의 국어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오늘 영상은 ‘유민영’의 ‘비운의 선구자 윤심덕과 김우진’을 참고해서 만들었습니다. 내일의 국어 이야기는 춘원 이광수와 우리나라 최초의 여의사 허영숙의 사랑 이야기입니다. 내용이 재밌고 도움이 되셨다면 구독과 좋아요 부탁드립니다. 시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무튼 국어 이야기

어쨌든 국어 이야기

이것도 국어 이야기

 

안녕하세요. '어쨌든 국어'입니다.

'국어가 유익하면서도 흥미로울 수는 없을까?'

저희 채널은 이런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고민에서 시작합니다.

 

* 목차

1. 김우진과 윤심덕의 현해탄 정사

2. 김우진과 윤심덕의 첫 만남

3. 윤심덕과 김우진의 성격

4. 연인으로 발전하게 된 계기

5. 두 사람의 시련

6. ‘사의 찬미’가 나오게 된 배경

7. 두 사람의 정사 이후 소문

8. 사랑을 영원하게 만들기 위한 그들의 결단

9. 여전히 진행 중인 자유연애 사상

 

* BGM

‘사의 찬미’(윤심덕) : https://www.youtube.com/watch?v=lG4LolklcbQ

도나우강의 잔물결(이바노비치) : https://www.youtube.com/watch?v=gary1K1SVq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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