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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우리는 언제 사진을 찍게 될까요? 길을 가다가 너무 예쁜 꽃을 발견하거나 먹기 아까울 정도로 예쁘게 플레이팅 된 음식이 나왔을 때일 겁니다. 우리는 특별할 것 없는 풍경에는 셔터를 누르지 않습니다. 곧 사라져버릴 어떤 소중하고 특별한 대상을 간직하기 위해 우리는 사진을 찍습니다. 물론 사진 한 장에 내가 느낀 것을 온전히 담을 수는 없기에 항상 아쉽습니다. 그래도 지금, 이 순간의 감격을 오래오래 간직하고 싶으니 아쉬운 대로 찍는 것이죠. 시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싶습니다. 오늘은 특히 ‘시’를 중심으로 해서 ‘문학적’인 글이란 어떤 것인지 그리고 왜 학교에서는 문학적인 글쓰기에 대해 가르쳐주지 않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사진과 마찬가지로 시 또한 내 안에서 어떤 특별한 감정, 느낌이 일어났을 때 쓰여집니다. 지금까지 느꼈던 것들과는 완전히 다른 그리고 특별한 그 무엇이기에 어떻게든 그것을 포착해 언어로 남겨두려는 것이죠. 즉 사진은 그림으로, 시는 언어로 남겨두는 것입니다. 오늘의 결론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문학적인 글’, ‘시’는 ‘단독적’인 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단독성’이란 절대적으로 다른 특성, 즉 다른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고유한 속성이라는 뜻입니다.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이 ‘단독성’을 실감하게 되는데요. 그 누구에게서도 느끼지 못한 특별한 감정이 들기 때문이죠. 그러나 ‘사랑’이라는 한 단어에 지금 온몸에서 요동치는 이 느낌을 모두 담을 수는 없습니다. 단순히 ‘사랑’이라는 단어만으로는 뭔가 부족하다는 것을 절감하게 되죠. 또한 저들의 ‘사랑’과 달리 우리의 ‘사랑’은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특별한 것인데 똑같이 ‘사랑’이라뇨. 용납이 안 되죠. 그래서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자신들만의 ‘단독적’인 이 사랑의 느낌을 표현하기 위해 언어를 깎고 창조해내려고 합니다. 그렇게 시가 탄생하는 것이죠. 정리하면, 우리가 어떤 ‘단독적’인 경험을 하게 되면, 언어의 한계를 느끼게 되는데 그것을 극복하려는 과정에서 시가 탄생하는 것입니다.
언어에 민감한 사람들은 두 번째 사랑에 빠졌을 때 ‘사랑해’라는 말을 주저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첫 번째 연인에게 이미 ‘사랑해’라는 말을 써버렸는데, 또 ‘사랑해’라는 말을 쓰기엔 이 두 번째 연인에게서 느껴지는 감정은 그때의 것과는 사뭇 다르기 때문이죠. 첫 번째 사랑은 포근하고 편안한 느낌이었지만 지금의 사랑은 미친 듯이 휘몰아칩니다. 이렇게 다른데 어떻게 똑같이 ‘사랑해’라는 단어를 쓸 수 있겠어요. 물론 우리 같은 사람들은 곧 항복하고 또 똑같이 ‘사랑해’라고 하겠지만요. 그러나 집요한 우리 시인들은 이 둘을 구별하는 언어를 창조해냅니다. 예를 들어 부드럽고 달콤한 사랑이라는 의미에서 ‘마시멜로해’라는 말을 만들어낼 수도 있고, ‘브레이크 없는 폭주 기관차 같은 사랑’처럼 비유를 써볼 수도 있겠죠. 그래서 시를 읽을 때 직유법, 은유법 이런 것들을 분석하는 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이번엔 직유를 써볼까? 다음엔 환유를 써봐야겠군.’ 하면서 쓰는 시인은 없습니다. 그저 자신이 느낀 고유하고 특별한 느낌을 어떻게든 근접하게 표현하려고 노력할 뿐이죠. 그 과정에서 은유도 쓰고 직유도 쓰는 것이지 수사법 자체가 시의 어떤 조건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랑하는 애인은 내게 ‘단독적’인 존재입니다. 다시 말해 대체 불가능한 존재인 것이죠. 그래서 헤어진 친구에게 ‘세상엔 여자가 반이야. 또 만나면 되지’라는 말이 전혀 위로가 안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세상에 여자가 많다고 하더라도 내가 사랑했던 그녀는 아니기 때문이죠. 이제 ‘단독성’이라는 개념이 이해가 되시나요? 문학적인 글은 이렇게 ‘단독적’인 글이면서 ‘순간’의 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매번 ‘현재’를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대부분의 시간 동안 우리는 ‘과거’를 살아갑니다. 오늘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아침 7시에 일어나 씻고, 지하철로 회사에 출근합니다. 내 눈에 들어온 세계는 어제와 다를 게 하나도 없습니다. 하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내 앞의 세계는 매일매일 다르게 펼쳐집니다. 어제 먹은 식빵과 오늘 먹은 식빵도 모양이나 성분은 조금씩 다를 것이고, 지하철에 탄 사람들도 어제와는 다를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에게는 똑같아 보이죠. 이처럼 우리는 지금 이 순간순간을 살아가기보다 과거의 기억으로, 습관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시인들은 순간을 살아가는 사람드입니다. 시인들은 작년에 핀 벚꽃과 올해 핀 벚꽃은 대체 불가능한 완전히 다른 꽃이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지금 내 이마를 스치는 이 바람도 방금 전에 불었던 바람과 다르게 느끼죠. 이것이 바로 문학적 감수성입니다. 순간순간의 세계를 다르게 그리고 고유하게 느끼는 감수성이요. 그래서 똑같아 보이는 이 세계를 얼마만큼 ‘단독적’으로 느끼느냐가 우리의 감수성의 폭과 깊이를 결정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세계가 매 순간 그렇게 다르게 느껴지는데 그것을 일반적인 언어로 담을 수 있겠어요? 그래서 시인은 단독적인 그 순간의 경험을 가장 잘 담을 수 있는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내고자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쓰여진 시는 그 ‘순간’의 단독적인 경험을 담은 ‘순간’의 글이 되는 것이죠.
또 ‘문학적인 글은 ‘개성적’인 글입니다. 요즘 학교에서 창의성 교육을 강조하는데, 정작 어떤 게 창의적이고 어떤 게 개성적인지에 대해서는 알려주지 않습니다. 어떤 것을 독창적이고 개성적인 것으로 평가하기 위해서는 우선 ‘전형’적인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것에서 벗어난 것이 곧 개성적인 것이 될 테니까요. 언어의 측면에서 전형적인 것은 ‘일상 언어’입니다. ‘일상 언어’는 ‘사실’의 세계를 표현합니다. 사계절이 어떻게 되죠? 그렇죠. 봄여름가을겨울이죠? 이 ‘사실’로서의 ‘일상 언어’를 받아들이는 순간 안타깝게도 우리는 우리의 개성을 발휘할 기회를 놓치게 됩니다. 적어도 이 ‘사계절’에 관해서는 말이죠.(가을겨울봄여름) 노래를 들어보니 어떤가요? 아직도 사계절은 여전히 봄여름가을겨울인가요? ‘가을겨울봄여름’이라는 표현은 오직 자신의 관점에서 세계를 바라보고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이것이 바로 ‘일상 언어’와 다른 ‘문학 언어’인 것이고, ‘전형적’이 아닌 ‘개성적’인 표현이 되는 것입니다. ‘문학 언어’는 ‘일상 언어’처럼 ‘사실’의 세계를 담은 언어가 아니라, ‘느낌’의 세계를 담은 언어입니다. 철저하게 나 자신의 관점에서, 세계를 주관적으로 느끼고 표현한 언어인 것이죠. 똑같은 새 소리를 듣고 ‘새가 노래한다’고 말하는 사람과 ‘새가 슬피 운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설마 이것도 ‘흠....... 의인법을 썼군.’ 이렇게 분석하면서 좋아하고 있는 친구는 없겠죠? 새 소리가 노래처럼 들리는 사람은 아마 지금 데이트하러 가는 길일 겁니다. 그리고 새가 슬피 우는 것처럼 느껴지는 사람은 어쩌면 어제 이별했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럼 누가 맞는 거죠? 누가 맞고 틀린 게 아닙니다. 새한테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구요. 우리는 모두 우리 나름대로 세계를 해석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세계는 우리 밖에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기보다 우리 주관 속에 있는 셈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우리가 주관적으로 느낀 세계, 즉 ‘단독적’인 나의 ‘느낌’의 세계를 언어로 표현한 것이 ‘문학 언어’가 되는 것입니다. ‘새 소리가 들렸다’처럼 단순히 사실 그대로를 진술하는 ‘일상 언어’와는 좀 다르죠? 그럼 이제 왜 이성복 시인이 ‘예술이 진정한 삶을 복원하기 위한 시도라면, 예술은 일상적 삶과는 반대 방향으로 진행할 것이다. 즉 사실에서 느낌으로, 안전에서 위험으로.’라고 했는지 이해가 되시나요?
그렇다면 왜 학교에서는 시 쓰기를 비롯해 문학적인 글쓰기를 가르쳐주지 않는 걸까요? 앞의 내용을 잘 따라오셨다면 이미 그 정답을 알고 계실 거라 생각합니다. 정답은 가르칠 수 없으니까 그렇겠죠? 어떻게 자신만의 고유한 느낌과 ‘단독적’인 표현을 미리 가르칠 수 있겠어요? 그리고 그러한 미묘한 지점들은 결코 언어로 규정될 수 없으며 또한 전달되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문학적 글쓰기는 가르칠 수도 없지만, 가르쳐서도 안 됩니다. 만약 시 창작에 대한 체계적인 이론을 정리해 이것을 가르치고 배운다면 그리고 그것에 따라 시를 쓴다고 한다면, 과연 그걸 시라고 할 수 있을까요? 어떤 방법이 정해지고 그것에 따르는 순간 그것은 ‘전형’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그것에 포섭되는 순간 나만의 ‘단독적’인 느낌과 ‘개성’은 죽어버리게 되죠. 그래서 시론에서는 상대성이론처럼 하나의 통일된 이론체계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있다면 ‘김소월의 시론’, ‘김수영의 시론’과 같이 각각의 시론이 있을 뿐이죠. 모든 시인은 자기만의 방식으로 시를 씁니다. 아니, 자기만의 방식이 없다면 그 사람을 시인이라고 부를 수 없다고 해야 더 정확하겠네요. 시는 오직 ‘나’니까 쓸 수 있는 글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국어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내용이 재밌고 도움이 되셨다면, 구독과 좋아요 부탁드립니다. 시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무튼 국어 이야기
어쨌든 국어 이야기
이것도 국어 이야기
안녕하세요. '어쨌든 국어'입니다.
'국어가 유익하면서도 흥미로울 수는 없을까?'
저희 채널은 이런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고민에서 시작합니다.
* 목차
1. 시가 쓰여지는 순간
2. 문학적인 글은 '단독적'인 글
3. 문학적인 글은 '순간'의 글
4. 문학적인 글은 '개성적'인 글
5. 학교에서 문학적인 글쓰기를 가르치지 않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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