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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8Jq-CYzFTa8

 

조선 남성의 심사는 이상하외다. 자기는 정조 관념이 없으면서 처에게나 일반 여성에게 정조를 요구하고 또 남의 정조를 빼앗으려고 합니다. - <이혼고백장>(1934)

  우리나라 최초의 페미니스트이자 소설가, 작가였던 나혜석이 1934년 ‘삼천리’라는 잡지에 발표한 ‘이혼 고백장’의 한 구절입니다. 미모는 물론 능력 면에서도 당시 신여성들 중 단연 으뜸이었던 그래서 모든 남성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던 나혜석은 과연 어떤 사랑을 했을까요? 오늘은 나혜석의 남자들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이 되겠습니다.

 

  나혜석의 첫사랑은 ‘최승구’라는 시인이었습니다. 와세다 대학에 춘원 이광수가 있다면, 게이오 대학에는 최승구가 있다고 할 만큼 주목받는 시인이었는데요, 친구였던 나혜석의 오빠, 나경석을 통해 나혜석을 알게 되었습니다. 둘은 만나자마자 곧바로 사랑에 빠졌고 친구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약혼식도 치렀다고 합니다. 이렇게 둘은 시인과 화가로서 서로의 예술에 대한 깊은 이해와 공명 속에서 둘만의 세계를 만들어 갔습니다. 이 둘의 사랑은 유학생들 사이에서 큰 화젯거리였는데요, 담벼락에 ‘나혜석은 내 꺼’라는 유치한 낙서들이 즐비했을 정도라고 합니다. 나혜석은 당시 도쿄 사립 여자미술학교 서양학과에 다니고 있었는데, 아버지가 얼굴도 모르는 남성과의 결혼을 강요하자, 이를 거절하고 여주 고등보통학교에서 1년 간 교사로 있으면서 학비를 마련했다고 합니다. 당시 최승구는 대부분의 조선 사람들이 그러했듯이 어렸을 때 결혼해 유부남이었습니다. 물론 아내는 사랑의 대상은 아니었습니다. 아내에게 최승구도 마찬가지였구요. 부모님들이 시켜서 한 결혼이었으니까요. 최승구는 나혜석과 결혼하겠다며 지금의 부인과 이혼하겠다고 말합니다. 집에서는 당연히 결사반대했고 그러던 중 폐병에 걸립니다. 그래서 전남 고흥에 있는 형 집에서 요양하며 지냈는데 병세가 위독해지자 나혜석을 부릅니다. 나혜석은 여자 혼자 몸으로 전남 고흥까지 찾아가 하루 종일 함께 있어 줍니다. 저녁이 되어서야 떠났는데, 떠난 다음 날 최승구는 세상을 떠납니다. 마치 나혜석을 만나기 전까지는 절대 숨을 멈출 수 없었다는 듯이 말이죠. 나혜석은 계속 남아 간호했더라면 그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스스로를 자책하며 극도의 신경 쇠약에 걸려 반년간을 고통 속에서 보냅니다.

 

  그렇게 첫사랑과의 이별을 견뎌내던 중 오빠 나경석의 소개로 김우영을 알게 됩니다. 도쿄 대학 법학부에 다니고 있었고 경제적으로도 안정되었기에 나혜석의 예술 활동을 뒷받침해 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서 적극적으로 중개를 한 것이죠. 그러나 예술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김우영에게 나혜석은 마음이 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춘원 이광수와의 연애를 시작하게 되었는데요, 그때 이광수는 나혜석의 친구이자 조선 최초의 여의사였던 허영숙과 교제 중이었습니다. 나혜석도 이를 알고 있었지만, 이광수가 워낙 적극적으로 구애를 하기도 했고 별로 그런 것에 개의치 않았던 나혜석이었기에 둘은 불꽃 같은 사랑을 시작합니다. 허영숙에게는 화요일, 목요일에만 오라고 하고, 나혜석과는 수요일과 금요일에만 만나는 것으로 날짜까지 정했다고 하는데요,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이죠? 이를 눈치챈 허영숙이 펄펄 뛰며 이광수에게 결단을 요구하자 이광수는 결국 허영숙을 선택합니다. 그리고나서 나혜석에게 자신과 헤어졌다는 내용의 편지를 허영숙에게 보내 달라고 부탁합니다. 나혜석은 이런 말도 안 되는 부탁을 또 쿨하게 들어줍니다. 이광수에 대한 마음은 실연을 느끼지 않을 정도의 정열이었으니 사랑이 아니었다며, 두 사람의 사랑을 축복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 친구 허영숙을 달래줍니다.

 

“내가 이 씨를 사랑한 것은 다만 성격이 같은 점이 많다는 것밖에는 없었소. 허 씨를 나 몰래 사귀었다고 해서 실연은 느끼지 않을 정도의 정열이었으니, 그것을 무슨 사랑이라 하겠소. 오직 두 분의 사랑의 길에 애로 없으시기를.

 

  그렇게 춘원과의 짧은 사랑을 끝내고 나혜석은 순정파 김우영의 곁으로 돌아갑니다. 이광수와 만날 때도 계속해서 한결같이 자신을 기다려주었던 김우영에게 점차 마음을 열게 된 것이죠. 그렇지만 결혼까지 할 생각은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양쪽 집안에서 강하게 압박을 넣자 못이기는 척 결혼하게 됩니다. 이때 나혜석은 청혼을 받아들이면서 세 가지 요구 조건을 내거는데요,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일생을 두고 지금과 같이 나를 사랑해 주시오.
둘째, 그림 그리는 것을 방해하지 마시오.
셋째, 시어머니와 전처 딸과는 따로 살게 해주시오.

 

  결혼을 하는데 조건을 내건다는 것 자체도 파격이지만 내용 하나하나가 당시 정서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남편에게 사랑을 요구하는 1번부터가 일단 혁명이었습니다. 당시 남편과 아내는 사랑의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이죠. 뭐 이것까지는 자유연애가 점점 유행하던 시기였으니 이해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3번은 지금도 받아들이기 힘든 조건입니다. 시어머니를 모시지 않겠다뇨. 그러나 이것은 결혼이라는 제도가 갖는 본질적인 문제를 건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두 사람만의 문제입니다. 그러나 결혼이라는 제도 속으로 들어가게 되면 게임은 달라지죠. 결혼은 가문과 가문이 결합하는 식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두 사람이 아닌 다른 관계들이 복잡하게 얽혀 들어옵니다. 물론 그것이 두 사람의 사랑을 키워주고 더욱 견고하게 만들어준다면 상관없겠지만, 대개 두 사람의 사랑을 질식시키는 쪽으로 작용합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이 남자인데, 왜 그 사람의 어머니까지 존경하고 사랑해야 하죠?” 나혜석은 3번 조건을 통해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 우리의 결혼제도에 대해서도 한 번쯤 생각해보게 만드는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아무튼 사랑에 눈이 먼 김우영은 그 세 가지 조건을 다 받아들이고 나혜석과 결혼하게 됩니다. 둘은 곧 신혼여행을 떠나는데요, 당시 신혼여행 자체가 거의 없었던 시절이니 그것만으로도 화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에게 더 충격을 준 것은 신혼여행지였습니다. 나혜석은 여행 경비를 전부 자기가 부담하기로 하고 김우영을 어디론가 데리고 가는데요, 그곳은 바로 자신의 첫사랑, 최승구의 무덤이었습니다. 아무리 콩깍지가 씌었다고는 하지만 김우영도 이건 좀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나혜석이 이날을 끝으로 첫사랑과의 추억을 영원히 묻고 김우영, 자신에게 영원히 충실할 것을 맹세한다고 하니 김우영도 뭐라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렇게 최승구와 주고받았던 모든 편지와 사진을 태워 비석 밑에 묻으며 첫사랑과의 이별 의식을 함께 치릅니다. 이러한 신혼여행 묘비 사건은 같은 폐허파 동인 염상섭의 소설 ‘해바라기’의 소재가 되기도 했습니다. 염상섭과도 사귀었다는 소문이 있는데, 일반적으로 이 둘은 서로 존중하는 사이였던 것으로 봅니다. 아무튼 나혜석은 결혼 후 탄탄대로를 걷습니다. 만삭의 몸을 이끌고도 경성에서 최초로 서양화 개인전을 열어 성공했고, 두 번째 소설 ‘규원’을 발표해 소설가로도 인정받았습니다. 셋째 아이까지 낳아 기르면서도 매년 조선 미술 전람회에 출품해 입선할 정도로 화가로서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에게 포상으로 유럽 여행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집니다. 그렇게 1927년 7월 나혜석은 파리에 머물면서 미술을 공부할 수 있게 됩니다. 여기서 나혜석의 네 번째 남자를 만나게 되는데요, 그는 민족지도자 33인 중 한 명으로 나중에 변절하는 인물인 최린이었습니다. 김우영은 명망가였던 최린에게 나혜석을 잘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고 베를린으로 법률 공부를 위해 떠납니다. 최린은 김우영과 달리 풍부한 지식을 갖추고 있었고, 예술적으로도 조예가 깊어 나혜석과 대화가 통했습니다. 그렇게 나혜석은 자신의 예술적 감성을 이해해주는 최린에게 매력을 느꼈고, 11월 20일 오페라를 본 후 셀넥트 호텔에서 하룻밤을 함께 보냅니다. 당시 파리 유학생들 사이에서는 나혜석을 ‘최린의 작은댁’이라고 할 정도로 이미 소문이 파다했습니다. 김우영도 이를 알았지만 다시는 최린을 만나지 말 것을 요구하고 이혼까지 가지는 않았습니다. 당시 나혜석은 자신의 외도에 대해 당당했는데요, 이혼을 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의 바람은 죄가 아니며, 오히려 남편에게 더 잘 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심지어 이러한 불륜적 감정은 진보된 사람이라면 마땅히 가져야 할 것이라고까지 말합니다. 이러한 그녀의 주장은 또 한 번 조선을 발칵 뒤집어 놓습니다. 100년이 지난 지금도 받아들이기 힘든 주장을 우리는 어떻게 봐야 할까요? 나중에 김우영이 이를 가지고 이혼을 요구했을 때, 잘못을 인정하고 진심으로 용서를 빌었던 것을 생각해본다면, 이것은 그녀가 당시 조선 사회에 던진 하나의 메시지로 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당시 남성들은 둘, 셋씩 첩을 두어도 비난은커녕 오히려 능력 있는 사람으로 여겨졌지만, 여성들에게는 정조가 강요되었습니다. 실제로 온갖 욕과 ‘음탕녀’라는 비난을 받은 자신과 달리 같이 바람을 피운 최린에게는 어떠한 비난도 없었고, 오히려 그는 친일파로서 출세 가도를 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혜석은 유독 여성에게만 정조 관념이 강요되던 당시 조선 사회를 비판하기 위해 그런 극단적인 주장을 했던 게 아닐까요? 아무튼 그녀의 본심이 무엇이었든 간에 결국 그녀는 이혼을 당하고 집에서 쫓겨납니다. 세간의 비난과 함께 화가로서의 평판도 나빠지면서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게 되는데요, 그래서 옛 애인 최린에게 도움을 청하지만 거절당합니다. 화가 난 나혜석은 최린을 상대로 정조 유린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합니다. 즉 강간당한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죠. 이것은 당시의 성관계가 정말 강제적인 것이었다기보다 잠깐이지만 연인이었던 자신의 부탁을 그렇게 매몰차게 거절한 것에 대한 분노 때문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이혼 고백장’에 최린을 사랑했다고 스스로 기록하고 있으니까요. 최린은 사건이 커질 것을 염려해 돈 몇천 원을 주고 소송을 취하하게 합니다. 이후 나혜석은 중이 되기로 결심하고 친구 김원주가 있는 <수덕사>를 찾아갑니다. 그러나 아이들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해 결국 불가에 귀의하지는 못했습니다. 중풍에 걸려 손발조차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던 그녀는 1944년 10월 청운양로원에 들어가게 되는데, 이즈음부터 정신 분열 증세를 보였다고 합니다. 나혜석은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며 김우영에게 생계를 도와줄 것과 자녀를 보게 해 달라고 했지만 거절당합니다. 그러다가 결국 나혜석은 1948년 12월 10일 추운 겨울날 길 위에 쓰러져 숨을 거두게 됩니다. 행려 사망자로 간주되어 그녀의 시체는 화장 후 산에 뿌려져 쓸쓸한 무덤 하나 남기지 못했는데요, 13년 전에 남긴 유언만이 남아 우리들을 아련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남매 아이들아, 에미를 원망치 말고 사회 제도와 도덕과 법률과 인습을 원망하라. 네 어미는 과도기에 선각자로 그 운명의 줄에 희생된 자였느니라. 후일 외교관이 되어 파리 오거든 네 에미의 묘를 찾아 꽃 한 송이 꽂아 다오.” - <신생활에 들면서>(1935)

 

  여기까지가 우리나라 최초의 페미니스트이자 소설가, 화가였던 나혜석의 쓸쓸한 사랑 이야기였습니다. 나혜석만큼 평가가 극과 극으로 갈리는 인물이 또 있을까 싶은데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댓글로 남겨주시면 저도 제 개인적인 생각을 또 남겨드리겠습니다. 사실 나혜석에 대해서는 더 얘기할 것들이 많습니다. 독립운동가로서의 모습도 있고, 앞서 봤던 윤심덕과의 인연도 재밌습니다. 호박고구마 나문희 할머니의 먼 친척이라고도 하는데, 아무튼 좀 더 공부를 해서 다음엔 나혜석의 글들을 바탕으로, 그녀의 사랑 이야기가 아닌, 문학과 삶에 대한 이야기를 한 번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의 국어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내용이 재밌고 도움이 되셨다면 구독과 좋아요 부탁드립니다. 시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무튼 국어 이야기

어쨌든 국어 이야기

이것도 국어 이야기

 

안녕하세요. '어쨌든 국어'입니다.

'국어가 유익하면서도 흥미로울 수는 없을까?'

저희 채널은 이런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고민에서 시작합니다.

 

* 목차

1. 우리나라 최초의 페미니스트, 나혜석

2. 나혜석의 첫사랑, 최승구

3. 나혜석의 두 번째 남자, 이광수

4. 나혜석의 세 번째 남자이자 남편, 김우영

5. 나혜석의 네 번째 남자, 최린과의 스캔들

6. 정조에 대한 나혜석 생각

7. 이혼 후의 쓸쓸했던 나혜석의 삶

8. 기타 나혜석과 관련된 재밌는 사실들

 

* 중간에 여자 음성은 인공지능 성우 서비스 타입캐스트(https://typecast.ai)를 통해 제작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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