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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춘원 이광수와 허영숙의 사랑 이야기

영원한 현재 2021. 6. 19. 21:57


https://youtu.be/3NvgNeHLX5A

현대 소설의 아버지이자 조선의 3대 천재 중 한 명이었던 춘원 이광수는 문학사에서 아픈 손가락 같은 존재입니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친일을 했기 때문이죠. 이를 두고 문학평론가 김현은 “이광수는 만지면 만질수록 그 증세가 덧나는 그런 상처와도 같다. 조선 현대문학사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지만, 그의 친일로 조선 정신사에 감출 수 없는 흠집을 만든 사람이 이광수.”라고 이야기합니다. 물론 오늘은 이광수의 친일 행적에 대해 다루진 않겠습니다. 그보다도 그의 뜨거웠던 사랑 이야기에 집중해보려고 합니다.

이광수는 1917년 스물여섯 살 당시 결핵 진찰을 위해 우시고메 여자의학전문학교 부속 병원에 들렀다가 ‘허영숙’이라는 여자를 만나게 됩니다. 그녀는 당시 실습차 나와 있던 의대생이었는데요, 일설에 따르면 그 전에 유학생회 모임에서 처음 만난 것이라고도 하는데, 어찌 됐든 두 사람의 사랑이 익어간 것은 환자와 의사라는 관계를 통해서였습니다. 병원비가 부족해 어쩔 줄 몰라하는 춘원의 모습을 보고 허영숙은 “좋으시다면 제가 빌려드리겠습니다.”라고 합니다. 그렇게 두 사람의 인연은 시작되는데요, 어느 날 허영숙은 약을 사서 이광수의 하숙집에 찾아갔습니다. 몇 번을 주저하다가 겨우 용기를 내어 대문을 들어섭니다. 당시를 회고하는 인터뷰 내용에 따르면 얼굴이 너무 화끈거려 그저 약과 몇 마디 말을 던지고 휙 나와버렸다고 하는데요. 여자로서 남자를 찾아온 것이 부끄럽기도 했고 또 평소 숭배하던 사람을 만나서 그랬던 것이겠죠. 당시 이광수는 최초의 현대 장편소설 ‘무정’을 써서 모든 이의 사랑을 받고 있던 슈퍼스타였습니다. 나름 잘생겼었다고도 하구요. 그렇지만 이광수에게는 처와 아들이 하나 있었습니다. 유부남이었죠. 그렇지만 사랑이라는 건 원래 맹목적인 것이니 그런 것들은 사실 둘에게 전혀 상관이 없었습니다. 물론 죄책감이 들었겠지만 허영숙은 이광수를 ‘가만두면 죽을 환자’로 여기며 의사로서 도와주는 것이라고 스스로를 정당화했습니다. 이광수 또한 그녀의 사랑을 얻기 위해 스스로를 더욱 불쌍하게 보였구요. 둘은 1918년 7월 야마키타, 수와, 후지산이 보이는 해변가 등으로 요양지 여행을 다녀옵니다. 이후 결혼을 약속한 것으로 보아 약혼 여행이었겠죠. 당시 춘원과 영숙의 사랑을 질투하고 헐뜯는 사람들이 많았는데요, 특히 나혜석의 오빠였던 나경석은 허영숙을 짝사랑하고 있었기에, 춘원이 애까지 딸린 유부남이라는 사실을 떠들고 다녔고, 허영숙의 어머니에게도 춘원에 대해 나쁘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뜨겁게 자신들만의 세계를 만들어갑니다. 물론 동경 유학 당시 춘원은 잠깐 ‘나혜석’과도 연애를 합니다. 이건 다음 영상을 기대해주세요. 아무튼 곧 허영숙이 대학을 졸업하게 되면서 조선으로 돌아가게 되는데요, 이광수는 1년만 더 머물러 달라고 간청했지만, 허영숙은 이를 떨쳐 버리고 귀국합니다.

“영을 도쿄 시내 격장에다 두고도 내 이렇듯 마음이 불안하며 초조하고 보고 싶고 견딜 수 없는데 만 리 밖 고국에다 두고 내가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사랑하는 영숙에게>, 283쪽


이광수는 곧바로 이혼하고 허영숙과 결혼하고자 하지만, 허영숙의 집안에서 반대가 심했습니다. 아무리 <매일신보>에 논설과 소설을 쓰는 대단한 문인이라 할지라도 딸 가진 어머니의 눈에는 고아 출신의 한량에 지나지 않았으니까요. 모친을 설득하고자 무진장 노력했지만, 결국 마음을 돌리지 못했습니다. 둘은 결국 집을 탈출하기로 결심하고 1918년 10월 영숙이 의사 검정 자격시험에 합격하자마자 베이징으로 떠나기로 합니다. 거기에 의전 졸업생 친구가 의사로 있었기 때문에 생활비를 마련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광수도 학술 연구 목적으로 <매일신보> 사장 아베 요시이에로부터 소개장을 받아 떠납니다. 일설에 따르면 베이징행은 허영숙의 생각이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모던보이였던 춘원의 눈에 베이징은 모던하지 못한 준야만 상태의 시골이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춘원은 남중국 즉 상하이를 가고 싶어 했는데요, 당대 최고의 문명 수준을 자랑하는 대도시였기 때문이죠. 아무튼 그렇게 베이징으로 사랑의 밀월여행을 떠납니다. 둘은 베이징의 어느 아담한 호텔에서 둘만의 시간을 보내며 사랑을 키워갔는데요, 어느 날 춘원이 진지한 얼굴로 자신은 도쿄로 가봐야겠다고 말합니다. 1918년 11월,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곧 파리강화회의가 열린다는 소문이 들리자, 도쿄로 잠입해 독립운동을 하겠다는 것이죠. 아마 베이징에서의 생활이 견디기 힘들었기도 했겠고, 일본 공사관에 드나든다는 누명을 벗으면서도 허영숙과의 사랑을 지키는 방법으로 이러한 선택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게 춘원은 도쿄로, 영숙은 서울로 돌아오게 됩니다. 도쿄의 유학생 지도층들도 춘원이 필요했습니다. 독립선언서를 써야 했으니까요. 춘원은 자신의 하숙집에서 ‘2.8 독립선언서’를 쓰고 거사 사흘 전인 1919년 2월 5일 됴코를 떠나 상하이로 갑니다. 왜냐하면 누군가는 이 일을 세상에 알려야 했기 때문이죠. 참고로 ‘2.8 독립선언서’는 최남선의 ‘기미독립선언서’와 함께 명문으로 꼽힙니다. 어느 쪽이 더 명문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리겠지만, 당대 조선의 3대 천재로 불렸던 두 사람의 자존심 대결, 궁금하지 않으세요? 다음에 기회가 되면 이것도 다뤄보도록 하겠습니다.

상하이로 온 춘원은 ‘2.8 독립선언서’를 신문사에 돌리고 세계 요로에 전보를 칩니다. 그리고 여기서 도산 안창호를 만나게 됩니다. 도산과의 만남은 춘원 생에서 가장 운명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평소 그의 준비론에 감명을 받아 그와 마찬가지로 준비론자가 되어었었기 때문이죠. 아무튼 도산의 ‘흥사단’에도 가장 먼저 가입하고, 한집에 살면서 거의 비서처럼 그를 보좌합니다. 곧 임시정부가 세워지고 국무총리에 이승만, 내무총장에 안창호가 자리합니다. 춘원은 도산을 보좌하며 임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의 사장 겸 편집국장에 취임하고 주필이 되어 수많은 애국적, 계몽적 논설을 씁니다. 이때는 사원이랄 것이 없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기사는 춘원과 우리에게 ‘불놀이’라는 시로 잘 알려진 시인 주요한에 의해 쓰여졌습니다. 춘원은 상해에서의 열정적인 독립운동가로서의 삶에 만족했기에 허영숙에게 편지해 이곳에서 살림을 차리자고 합니다. 당시 허영숙은 조선에서 여자로서는 처음으로 ‘영혜 의원’이라는 병원을 열어 운영하고 있었고, ‘동아일보’에 여자 기고자로서 글을 쓰고 있었습니다. 터를 잡고 있었기 때문에 상해로 갈 생각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렇게 1년 정도는 편지만 주고받았는데요. 그러던 어느 날 허영숙은 편지를 한 통 받고 급하게 짐을 싸서 상해로 떠납니다. 편지는 자포자기한 생활에 대한 내용과 기생집에 다녔다는 내용, 그리고 그로 인해 건강이 많이 쇠약해졌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사실 여부를 떠나 이것은 사랑을 얻기 위한 이광수 특유의 동정심 유발, 즉 불쌍한 척이었습니다. 김윤식 교수님에 따르면 ‘고아 의식’에서 나온 ‘자해적 과장법’이었는데요, 이것은 춘원의 의도와는 달리 허영숙을 분노케 했습니다. 부랴부랴 본심을 담은 사과의 편지를 보내지만, 허영숙은 변명 그만하고 당장 그쪽 생활을 정리하고 귀국하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렇게 1921년 2월 허영숙은 상하이로 이광수를 찾아갑니다. 그런데 당시 임시정부는 어떤 이유에선지는 몰라도 허영숙을 ‘일제의 앞잡이’ 즉 ‘밀정’이라고 판단하고 체포령을 내립니다. 당시 김구가 임시정부 경무국장이었는데요, 김구의 추적은 집요했지만, 밤낮으로 거처를 수없이 옮겼기 때문에 잡히진 않았습니다. 아버지처럼 따르던 안창호도 이광수의 귀국을 만류했지만, 이광수는 끝까지 허영숙을 믿었습니다. 스파이를 사랑한 남자라...... 어디서 많이 들어본 내용이죠? 이 부분은 정말 영화로 만들어도 재밌을 것 같습니다. 어쨌든 춘원은 민족보다 사랑을, 아버지처럼 따르던 안창호보다 허영숙을 선택합니다. 1921년 2월 그렇게 먼저 허영숙을 돌려보내고 자신도 3월 말 홀로 귀국하는데요, 안타깝게도 중국 심양에서 체포됩니다. 그런데 재판도 받지 않고 불기소 석방됩니다. 이를 가지고 소설가 박종화는 “총독부의 신변 보장 언질 받은 밀정 허영숙의 설득 때문에 이광수가 귀순했다”며, 그가 이때부터 변절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 부분은 아직도 논란이 되고 있지만, 김윤식 교수님은 춘원에게 <매일신보>의 사장 아베 요시이에의 소개장도 있었고, 이전에 총독부에 보낸 친일적인 내용의 건의문을 바탕으로 일본이 그를 친일 인사로 판단했기 때문은 아닐까 하고 조심스럽게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사실 허영숙이 밀정이든 아니든 이광수의 변절은 이미 그 전부터 그의 삶 속에 내포되어 있었습니다. 임시정부에서 2년을 지냈지만, 춘원이 기대한 것만큼 국내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조선 내에서의 민심도 3.1운동 때와는 달리 추~욱 가라앉아 있었고, 임시정부도 재정난에 시달리고 있어 제대로 뭔가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독립신문도 마찬가지였구요. 그리고 임시정부 내 파벌 간 극심한 갈등을 지켜보면서 임시정부의 활동에 회의감을 느끼게 됩니다. 특히 1920년 6월 이동휘와 안창호가 파벌 갈등으로 상해를 떠난 것이 결정적이었습니다. 그렇게 이광수는 임시정부의 추태에 절망하고 있었습니다.

“아아 믿고 싶다/너는 나를 믿고/나는 너를 믿고/서로 믿고 싶다/그렇게 믿는 세상이 언제나 올까나 -<미쁨>, 이광수


그리고 그때 허영숙이 찾아온 것이죠. 그렇게 둘은 조선으로 돌아가 결혼합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이광수는 본격적으로 친일로 접어들게 됩니다.

여기까지가 춘원과 영숙의 사랑 이야기입니다. 친일과 불륜은 참 비슷한 것 같습니다. 일단 덮어놓고 욕부터 하게 되는 주제라는 점에서요. 물론 서로의 감정을 공유하는 것에 목적을 두는 일상적 대화에서 그런 인물들을 비난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하지만 그 사람을 이해해 보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면 혹은 인간 내면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것만으로 끝내는 것은 참 심심한 일입니다. 내 도덕적 우월감을 확인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아주 효과적이겠지만 그런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저로서는 저들이 왜 그런 결단을 내렸는지가 궁금할 뿐입니다. 어쩌면 저들의 갈등과 고민 속에 진짜 삶의 진실이 담겨있을지도 모른다는 조바심도 들면서요. 이광수는 분명 처가 있었고, 그 상황에서 다른 여자를 품었기 때문에 불륜남입니다. 또한, 명백하게 친일적인 글을 썼으니 친일파죠. 하지만 저는 마치 의사가 되어 배를 가르고 내장을 하나하나 꺼내 보듯이 그들의 내면을 있는 그대로 살펴보고자 했습니다. 의사가 피가 무서워 그 안을 들여다보지 못하면 안 되듯이 저 또한 인문학을 하는 사람으로서 선입견에서 벗어나 한 인간의 내면을 탐구하고자 했습니다. 아직 많이 공부가 부족하긴 하지만, 이 정도는 확실하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광수는 정말 제대로 사랑이란 걸 했고, 또 친일을 했지만 적어도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나 출세를 위해 친일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라고요. 이광수에 대해서는 좀 더 제대로 공부해서 영상을 준비하겠습니다. 오늘의 국어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오늘의 영상은 김윤식 교수님의 ‘이광수와 그의 시대’라는 책을 참고해 만들었습니다. 내용이 재밌고 도움이 되셨다면 구독과 좋아요 부탁드립니다. 이광수가 1949년 반민특위에 체포되었을 때 했던 말을 끝으로 영상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시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소가 열 필이 와서 끌어도 나는 이 자리를 안 떠날 것이오. 나의 목을 베어 종로 네거리에 매달아 정말 친일파가 없어진다면 나의 할 일은 다한 것이오.”

“나는 민족을 위해 친일을 했소. 내가 걸은 길이 정경대로는 아니오마는 그런 길을 걸어 민족을 위하는 일도 있다는 것을 알아주시오. 내가 왜 친일을 했는가에 대한 나의 진심은, 먼 훗날 이 나라 역사가 심판해 줄 것이오.”


아무튼 국어 이야기
어쨌든 국어 이야기
이것도 국어 이야기

안녕하세요. '어쨌든 국어'입니다.
'국어가 유익하면서도 흥미로울 수는 없을까?'
저희 채널은 이런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고민에서 시작합니다.

* 목차
1. 문학사에서 아픈 손가락인 춘원 ‘이광수’
2. ‘허영숙’과의 첫 만남
3. 사랑의 시련
4. 베이징으로의 밀월여행
5. ‘2.8 독립선언서’를 쓰고 상하이로 가는 ‘이광수’
6. 도산 ‘안창호’과의 만남
7. 임시정부에서 ‘독립신문’의 사장 겸 주필로 활동하는 ‘이광수’
8. ‘허영숙’을 밀정이라 판단하고 체포령을 내리는 임시정부
9. ‘허영숙’을 믿고 함께 귀국하는 ‘이광수’
10. ‘친일’과 ‘불륜’
11. ‘이광수’에 대한 진지한 고찰
12. 반민특위에 체포되었을 때 ‘이광수’가 했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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