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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노래로만 알고 있다는 ‘진달래꽃’입니다. 아니, 이젠 이 노래도 모르는 사람이 많지 않을까 싶은데요. 심지어 여자로 많이들 알고 있는 이 ‘진달래꽃’을 쓴 김소월 시인은 그래도 시인, 평론가들 사이에서는 항상 최고의 시인으로 꼽힙니다. ‘백석’과 1, 2위를 다투긴 하지만요. 물론 우리 같은 일반인들도 김소월의 시를 정말 좋아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교과서가 사랑하는 시인이죠. 김소월의 ‘시’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역시 ‘한(限)’입니다. 주입식 교육의 힘으로 모두 잘 알고 계실 겁니다. 그렇지만 ‘한(限)’이 정확히 무엇이고, 김소월이 어째서 그런 ‘한(限)’의 시인이 되었는지 제대로 아는 사람은 드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김소월의 ‘한(限)’스러운 삶을 조명해보면서 어째서 김소월이 ‘한(限)’의 시인이 되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여러분, ‘한(限)’이라는 건 어떤 감정일까요? 슬픔? 안타까움? 이 정도 단어만으로는 ‘한(限)’의 감정을 설명하기에 많이 부족합니다. 일차적으로 ‘한(限)’은 ‘상실감’에서 옵니다. 물론 애정의 대상을 잃었을 때겠죠. 그래서 ‘한(限)’은 절실한 소망의 대상, 즉 깊은 애정의 대상을 가져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감정입니다. 별로 사랑하지 않았다면 이별도 그다지 힘들지 않을 테니까요. 그러나 단순히 ‘상실감’만으로는 복합적인 이 ‘한(限)’의 감정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한(限)’은 모순되는 두 충동의 갈등에서 빚어지는 감정이기 때문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한(限)’은 ‘절망’과 ‘미련’의 갈등, ‘원망’과 ‘자책’의 갈등 사이에서 맺히는 감정입니다. 이별의 상황을 우리는 현실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계속 현실을 부정하고 거부하면서 언젠가 상대방이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기대하죠. 이를 ‘절망’과 ‘미련’의 갈등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이러한 미련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원망으로 변하게 됩니다. 상실감에 빠진 사람은 자신의 불행과 불운의 책임을 상대방에게 전가합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투사’라고 하는데요. 쉽게 말해 이별을 자신의 탓이라고 인정하기엔 너무 힘드니까 상대방을 증오함으로써 이를 해소하려고 하는 것이죠. 그런데 문제는 그 사람은 내가 누구보다 사랑하는, 그리고 사랑했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깊은 ‘한(限)’의 감정이 맺힙니다. 사랑해야 될 상대방을 오히려 미워했다는 자책감 때문에. 즉 ‘원망’과 ‘자책’이 갈등하면서 ‘한(限)’의 감정이 빚어지는 것이죠. 김소월의 시에는 ‘반어’, ‘아이러니’가 많이 나타나는데요, 이것은 ‘한(限)’이 갖는 이러한 모순적이고 복합적인 성격 때문입니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도 말없이 고이 보내드린다’고 하고, 사실 못 잊었지만 ‘잊었노라’라고 하는 이유는 님을 곱게, 즉 미련 없이 보내주는 것처럼 보여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님이 떠나지 못하도록 앙탈을 부리거나 타박한다면 도리어 자신을 추하게 여기고 진짜 정이 떨어져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별을 당한 사람에게 선택권은 없는 겁니다. 예쁘게 보내줄 수밖에. 그리고 그것이 시에서 ‘아이러니’로 드러난 것이구요.
‘한(限)’은 이처럼 앞으로도 뒤로도 가지 못하는 모순에 맺혀 있는 감정, 다시 말해 ‘어떻게 해도 풀 길이 없는 맺힌 감정’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면 김소월은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았길래 그의 시 전반에 이런 ‘한(限)’의 정서가 깔려있는 걸까요? 김소월의 ‘한(限)’은 크게 두 가지 상실에서 비롯됩니다. 하나는 아버지, 그리고 하나는 ‘오순’이라는 여인입니다. 먼저 김소월의 부친 ‘김성도’는 1904년 처가에 나들이를 가는 도중 철도 공사의 일본 목도꾼들에게 심한 폭행을 당합니다. 무수히 매를 맞고 말에 거꾸로 매달려 왔다고 하는데, 한 달이 넘도록 의식을 잃었다고 합니다. 겨우 깨어났지만 심한 정신 이상 증세를 보였습니다. 다행히 난폭한 행동으로 가족들을 괴롭히진 않았고 혼자 앉아 중얼거리기만 했다고 합니다. 일생을 폐인으로 살아가게 된 것인데요, 오이디콤플렉스로 인간의 성격 형성 과정을 설명한 프로이트에 따르면 아버지를 보며 그처럼 용감하고 훌륭한 남자가 되려는 과정에서 자아가 성숙한다고 합니다. 어린 시절 우리들에게 아버지는 말 그대로 슈퍼맨이었습니다. 부르기만 하면 금방 나타나서 모든 문제를 뚝딱 해결해주었으니까요. 그런데 그래야 할 아버지가 침을 질질 흘리고 있고, 자기보다 더 애처럼 행동한다면 그걸 보며 자란 아이는 과연 어떤 사람으로 성장할까요. 그리고 신동으로 불릴 정도로 똑똑했던 김소월은 아버지 때문에 친구들에게 심한 놀림을 당했고, 이로 인해 항상 열등감에 시달렸다고 합니다. 한양대 국어교육과 정재찬 교수님은 김소월에게 ‘정상인 콤플렉스’가 있었다고 말합니다. 유년 시절의 경험 때문에 평생을 정상인처럼 살고자 노력했다는 것이죠. 그래서인지 김소월은 보통 사람들처럼 평범하게 보이기 위해 그렇게 다작을 하면서도 생업을 놓은 적이 없었습니다.
아버지의 상실과 더불어 다른 가족들도 김소월의 ‘한(限)’을 더해갔습니다. 어머니 ‘장 씨’는 남편이 그렇게 되자 소월에게 모든 기대를 걸고 사랑을 쏟아부었습니다. 이런 비정상적인 사랑은 한 인간의 성격 형성에 결코 바람직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여인들이 대개 그러했듯이 문맹이었고 세속적인 가치에만 연연했기에 김소월은 자신을 이해해 줄 수 없는 그런 어머니로부터 깊은 고독감을 느꼈습니다. 김소월은 숙모였던 ‘계희영’과 오히려 많은 이야기를 했는데요, 그녀는 일찍이 언문을 깨우쳐 고대 소설과 설화를 탐독할 수 있었는데 김소월은 이러한 옛날이야기들을 좋아했다고 합니다. ‘접동새’, ‘물마름’ 등과 같은 시들은 숙모에게서 들은 설화를 바탕으로 쓰여진 시라고 하는데요. 그렇게 자신의 문학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자, 유일하게 자신을 이해해 주던 숙모도 곧 남편을 따라 평양으로 이사를 가게 되면서 소월은 더 침울해져 갑니다. 김소월의 할아버지는 가부장적인 유교 질서만을 고수하는 권위주의자였습니다. 소월의 내면적 고통이나 문학관 같은 것을 이해해 줄 수는 당연히 없었고, 계속해서 장손으로서 가문을 잇기만을 강요했습니다. 그래서 김소월이 외지로 나가 신학문을 공부하는 것에 대해 강렬히 반대했었는데요, 조부와의 갈등도 김소월의 ‘한(限)’을 더욱 짙어지게 했습니다. 이러한 가정에서 김소월은 항상 고독과 소외감 속에서 자신의 문제, ‘한(限)’을 스스로 안고 살아야만 했습니다. 김소월의 폐쇄적이고 내향적인 성격은 아마 이런 가정환경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김소월의 ‘한(限)’을 이루는 두 번째 상실은 바로 3살 많은 누나 ‘오순’입니다. 소월이 오산학교에 다니던 시절 만났다고 하는데요, 둘은 종종 마을 폭포수 아래서 몰래 사랑을 키웠다고 합니다. 그렇게 연인으로 발전했지만, 소월이 14살이 될 무렵 조부의 강권으로 원치 않는 결혼을 하게 됩니다. 상대는 당시 경제적으로 유복했던 남양 ‘홍명희’의 딸, ‘홍단실’이었습니다. 조부가 광산업에 손대면서 이 집안과 친했는데 아마 그런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결혼을 시킨 것으로 보입니다. ‘홍단실’은 교육을 받지 못한 순박한 시골 처녀였는데, ‘계희영’의 말에 따르면 얼굴은 결코 예쁘다 할 수 없었고 보기 싫을 정도로 키가 컸다고 합니다. 아무튼 그렇게 소월이 결혼하게 되고 또 얼마 후 오순도 결혼하게 되면서 연락이 끊겼습니다. 연락은 끊겼지만, 소월은 오순을 잊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3년 뒤 김소월은 청천벽력같은 이야기를 듣습니다. 자신이 사랑했던 ‘오순’이 죽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그것도 남편에게 맞아 죽었다는 소식이요. ‘오순’의 남편은 의처증이 심했는데 매일같이 ‘오순’을 학대했다고 합니다. 소월은 그렇게 무너지는 가슴을 부둥켜안고 장례식에 참석했는데요. 어떤 심정이었을지 저는 감히 상상도 못 할 것 같습니다. 과연 제정신으로 살 수 있을까요? 그렇게 장례식장에서 돌아와 피를 토하며 쓴 시가 있는데요, 그것이 바로 ‘초혼’이라는 시입니다. (+초혼 띄우기) ‘초혼’은 죽은 사람의 옷을 들고 지붕 위로 올라가 북쪽을 향해 이름을 세 번 부르는 장례 의식을 말하는데요, 그렇게 하면 나가버린 혼을 다시 부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염원에서 생긴 의식이라고 합니다. 김소월의 대부분의 시들은 감정이 절제되어있는데 이 시에는 ‘너무 과한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화자의 감정이 직접적으로 드러나 있습니다. 이 시의 사연을 몰랐을 때는 이해가 안 됐지만, 지금은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이러한 김소월의 ‘한(限)’은 비록 개인적인 경험에서 비롯되었지만, 민족이나 국가의 차원에서도 이해해 볼 수 있습니다. 개인의 ‘한(限)’을 민족적 ‘한(限)’으로 확장시키는 것이죠. 아버지를 잃은 개인적 경험을 ‘국가’라는 아버지를 잃은 우리 민족의 상황으로 볼 수도 있지 않겠어요? 김소월 하면 개인적 서정을 노래한 시인으로 많이들 알고 있지만, 식민지 지식인으로서 그 또한 민족의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김소월이 다녔던 오산학교는 3.1운동에 전 학생과 교직원이 참여할 정도로 강한 민족의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결국 설립자 ‘이승훈’이 3.1운동의 주모자로 체포되면서 총독부에 의해 강제 폐교되었지만, 오산학교 시절 김소월은 조만식, 김억 등의 선생에게 영향을 받아 민족의식을 형성했습니다. 또한 김소월의 큰고모부는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옥살이를 했고, 막내 숙부도 독립운동에 가담했다고 하는데요, 아마 이런 가족들에게서도 영향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소월은 관동 대지진 당시 동경에서 유학 생활 중이었는데요, 약 6천여 명의 조선인들이 죽창에 찔려 죽는 것을 목도해야만 했습니다. 조부가 힘을 써 급하게 다시 조선으로 돌아올 수 있었지만, 식민지 지식인으로서의 고뇌를 떨쳐버릴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물론 소월이 직접적으로 현실과 대결하여 싸우거나 민족 투쟁을 고취하는 시를 쓴 것은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저항 시인이라고 부르긴 어렵겠죠. 나쁘게 얘기하는 분들은 패배적 감상주의를 노래한 현실도피 주의자라고까지 말하는데, 저는 생각이 좀 다릅니다. 저는 김소월이 나름대로 자신의 방식으로 시대와 대결했다고 생각합니다.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민족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는 방법에는 꼭 직설적인 저항시를 쓰는 것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좌절과 한, 허무를 노래함으로써 오히려 독자들에게 투쟁의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고뇌하고 고통스러워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훌륭한 민족주의자이지 않을까요. 항상 부끄러워했던 윤동주 시인처럼요. 그래서 저는 김소월을 민족 시인이라고 충분히 부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소월은 지아비로서의 책임감이 투철해 그렇게 다작을 하면서도 생업을 놓은 적이 없었습니다. 1926년 동아일보 지국을 경영하며 생계를 이어갔는데요, 당시 주민들이 신문을 볼 여력이 없기도 했고, 비사교적인 성격, 무능력한 처세로 인해 경영이 어려워집니다. 너무 상황이 악화되자 고리대금업에 손을 대기까지 하는데요. 또 당시 요시찰 대상으로 지목되어 일본 순사들의 괴롭힘을 받습니다. 갑자기 찾아와 욕을 보이고, 힘들게 써놨던 작품들도 빼앗아갔습니다. 김소월은 문학과 삶에 대한 의욕을 잃은 채 술로 위안을 삼으면서 세상을 잊고자 했습니다. 그렇게 힘들었으면서도 아내를 비롯해 가족들에게 한 번도 자신의 번민을 털어놓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저 혼자 술을 마시며 독백하고 절규하고 웃으며 또 울기만 했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술에 아편을 타 마시고 32세의 짧은 나이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그의 삶을 조망해 봤을 때 사실 그의 죽음은 어쩌면 예견된 것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어떤 죽음을 선택하느냐의 문제였을 뿐이었죠. 오히려 32년을 버틴 것이 대견스러울 정도입니다. 그래서 김소월은 시인이 되지 않고는 배기지 못할 운명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마음에 맺힌 ‘한(限)’들을 속 시원히 풀어버리는 성격도 못 되었고, 주변에 소월을 이해해주는 사람도 없었기에 소월은 시를 쓸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요? 소월은 그 무거운 ‘한(限)’을 어떻게든 끌어안고 가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역시 역부족이었습니다. 작은 한 개인이 어떻게 그 정도의 고통을 감당할 수 있겠어요. 그렇게 소월은 무거웠던 삶을 내려놓고 죽음으로써 안식을 되찾습니다. 여기까지가 김소월의 ‘한(限)’스러운 삶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물론 소월이 반드시 앞에서 말한 두 가지 상실 때문에 ‘한(限)’이 담긴 시를 썼다고 하기엔 다소 무리가 있겠지만, 그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이 그의 ‘한(限)’의 깊이를 조금이라도 이해하는 데 작지만 도움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오늘의 국어 이야기는 시인이자 서울대 명예 교수님이신 오세영 교수님의 ‘김소월, 그 삶과 문학’을 참고해서 만들었습니다. 내용이 재밌고 도움이 되셨다면 구독과 좋아요 부탁드립니다. 시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무튼 국어 이야기
어쨌든 국어 이야기
이것도 국어 이야기
안녕하세요. '어쨌든 국어'입니다.
'국어가 유익하면서도 흥미로울 수는 없을까?'
저희 채널은 이런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고민에서 시작합니다.
* 목차
1. 한국인이 사랑하는 시인
2. 모순적이고 복합적인 감정, ‘한(恨)’
3. 김소월의 두 가지 상실(아버지, 오순)
4. 김소월을 민족 시인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
5. 김소월의 ‘한’스러운 삶의 마지막
6. 김소월의 삶과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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