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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기처럼 사랑은 언제나 갑자기 찾아옵니다. 예고 따윈 없죠. 언제 시작됐는지, 어느 틈에 내 인생에 스며들어 일상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버립니다. 그런데 신기한 건 흠뻑 젖었지만 묘하게 기분이 썩 나쁘지 않다는 겁니다. 기분 좋은 엉망진창이죠. 또한 우리 모두는 운명이라고 믿고 싶어 하지만, 사랑은 소나기가 내리듯 우연처럼 다가옵니다. 오늘 내가 늦잠을 자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버스를 놓치지 않았더라면, 버스 정류장에서 그녀를 만날 수 없었겠죠. 또 우연히 서점에서 동시에 같은 책을 집지 않았더라면, 그녀의 손이 나보다 빨랐더라면, 우리의 사랑은 시작조차 하지 못했을 테니까요. 또 사랑은 한여름 밤의 꿈처럼 항상 너무나 짧게만 느껴집니다. 그칠 것 같지 않던 소나기가 갑자기 뚝 그치듯 영원할 것 같던 우리의 사랑도 어느 순간 갑자기 끝나버립니다. 그래서 항상 아쉽고 후회만 남나 봅니다. 이처럼 소나기는 우리의 사랑과 너무나 닮아있습니다. ‘황순원’의 <소나기>에서 ‘소년’과 ‘소녀’의 사랑도 소나기처럼, 그렇게 갑자기 시작됐고, 또 갑자기 끝나버렸습니다. 오늘은 너무나 짧았던 그래서 더 안타깝고 애절한 ‘소년’과 ‘소녀’의 사랑 이야기를 살펴보겠습니다.
대개 첫사랑은 ‘백석’의 시처럼,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즉 무엇으로 보나 조건이 안 좋은 내가 넘보지도 말아야 할 사람을 사랑하게 되면서 시작되죠. ‘알퐁스 도데’의 <별>에서 목동이 주인의 딸을 사랑하는 것이나, ‘김유정’의 <동백꽃>에서 소작인의 아들이 마름의 딸을 사랑하는 것처럼요. <소나기>도 마찬가지입니다. 보잘것없는 집안의 평범한 시골 소년이 윤 초시네 증손녀를 좋아하게 되면서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객관적인 조건을 떠나서도 우리는 사랑을 하게 되면 누구나 극심한 열등감에 빠지게 됩니다. 화려하고 찬란한 그녀에 비해 나는 한없이 초라하게만 느껴지니까요. 그렇지만 이러한 열등감은 지금 사랑에 빠졌다는 증거이기에 어쩌면 행복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소년’은 징검다리 한가운데 앉아 물장난을 하고 있는 ‘소녀’가 비키기를 한없이 기다립니다. 비켜달라고 말도 못 할 만큼 소심한 소년이죠. 다행히 지나가는 사람이 있어 오늘은 그 뒤를 따라 징검다리를 건널 수 있었지만, 다음날은 지나가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여느 때처럼 ‘소녀’는 개울가에서 물을 움켜내며 놀고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소녀’가 ‘소년’에게 말 좀 걸어달라는 신호를 보내는 것이었지만 우리의 순진한 ‘소년’이 그것을 알 리가 없죠. 그러다 갑자기 “이 바보” 하며 조약돌이 하나 날아옵니다. 그리고선 ‘소녀’는 갈밭 사잇길로 달려가 사라져 버립니다. 과연 ‘소년’은 ‘소녀’의 마음을 알아챘을까요? 아무튼 ‘소년’은 조약돌을 쥐고 물기가 마를 때까지 ‘소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집으로 돌아옵니다.
다음 날은 ‘소녀’가 뵈지 않았습니다. ‘소년’은 ‘소녀’가 앉았던 징검다리 한가운데서 ‘소녀’를 따라 해봅니다. 그런데 개울에 비친 까만 자신의 얼굴이 싫어 몇 번이고 물을 움키어냅니다. 앞서 말했던 열등감이 드러나는 부분이죠. ‘소녀’를 만나기 전까지는 전혀 인식하지도 못했던 자신의 얼굴색이 하얀 ‘소녀’를 좋아하게 되면서 이제 부끄러워진 것입니다. 사랑에 빠진 거죠. 한참을 그렇게 있다가 ‘소녀’가 건너오는 것을 발견하고 깜짝 놀라 도망치기 시작하는 ‘소년’, 헛디뎌 넘어지면서 못 볼 꼴을 또 보여주고 맙니다.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집에 가는 내내 ‘바보, 바보’하는 소리가 ‘소년’의 귀에 맴도는 것 같았습니다.
다음 날, 이번에는 기다리지 않고 모르는 척 그냥 징검다리를 건너려고 하는데, “얘, 이게 무슨 조개지?”하고 ‘소녀’가 말을 겁니다. ‘소년’은 자기도 모르게 돌아서며 ‘소녀’의 맑고 검은 눈과 마주치는데, 얼른 고개를 떨구며 “비단 조개”라고 답합니다. 그렇게 둘은 저 산 너머로 함께 놀러 가게 됩니다. ‘소년’은 오늘 텃논의 참새를 봐야 하는 날이었지만 부모님께 혼날 각오를 하고서 갑니다. 그렇게 말 잘 듣던 착한 소년이었는데 역시 사랑의 힘은 대단하죠? 태어나서 처음으로 통금시간을 어기며 남자친구와 함께 있기를 선택한 여고생처럼 말이죠. ‘소녀’는 친구가 생겨 신이 났는지 허수아비 줄을 잡아 마구 흔들어대면서 달려갑니다. 원두막에 도착한 ‘소녀’가 “참외 하나 먹어봤으면......” 하자 ‘소년’은 무밭으로 들어가 무 두 밑을 뽑아 옵니다. ‘소년’은 남자답게 먼저 무를 우적우적 깨물어 먹기 시작하는데, ‘소녀’도 따라서 먹어보지만 맵고 지리다며 집어 던져버립니다. ‘소년’은 사실 맛있었지만 맛없어서 못 먹겠다며 더 멀리 팽개쳐 버립니다. 나보다 상대방의 감정이 더 중요해지는 경험, 이 놀라운 사랑의 경험을 ‘소년’은 지금 하고 있는 겁니다. ‘소녀’는 산에 널려있는 꽃들의 이름을 물으며, “나는 보랏빛이 좋아”라고 말합니다. ‘소년’은 말없이 또 이리저리 다니며 꽃들을 꺾어다가 꽃묶음을 만들어 줍니다. 서울에서 놀던 동무들이 생각난다며 ‘소녀’는 비탈진 곳에 있는 칡꽃을 따러 기어 내려가는데 미끄러져 무릎을 다치게 됩니다. ‘소년’은 저도 모르게 생채기에 입술을 가져다 대고 빨아줍니다. 아이가 차에 치이려 할 때 무작정 달려가 아이를 구하려는 사람처럼 너무나 순수한 모습이죠. 또 어디론가 가서 송진을 구해와 ‘소녀’의 무릎에 발라주고는 송아지가 있는 곳으로 가보자고 합니다. ‘소년’은 멋져 보이려고 또 훌딱 송아지 등에 올라타 보이지만 그러다가 농부에게 걸려 혼이 날 뻔합니다. 곧 비가 올 것 같다는 농부의 말이 끝나자마자 신기하게도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합니다. 둘은 일단 원두막으로 달려가 비를 그으려고 했지만, 지붕이 갈래갈래 찢어져 있어서 비가 샜습니다. 그런대로 덜 새는 곳을 소녀에게 양보하고 ‘소년’은 수수밭 쪽으로 달려갔습니다. 부지런히 수숫단을 날라다 덧세운 뒤 ‘소녀’에게 들어오라고 한 뒤 함께 수숫단 속에서 비를 피합니다. 안이 워낙 좁았기 때문에 ‘소년’은 앞쪽에서 거의 그냥 비를 맞아야만 했습니다. 그런 ‘소년’을 보고 ‘소녀’는 안으로 더 들어오라고 했고 그러다가 꽃묶음이 우그러들었습니다. 그래도 ‘소녀’는 상관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소년’이 더 중요했으니까요. ‘소년’이 가까이 오자 비에 젖은 ‘소년’의 몸 냄새가 확 났지만 ‘소녀’는 고개를 돌리기는커녕 오히려 따뜻한 몸기운으로 떨리던 몸이 누그러지는 듯했습니다. 곧 소나기가 그치고 불어난 도랑 앞에서 ‘소년’은 등을 돌려댑니다. 그렇게 ‘소녀’를 업고 ‘소년’은 도랑을 건너 집으로 돌아갑니다. 이 소설에서 특히 ‘소년’은 거의 말을 하지 않습니다. 행동만 나오죠. 비가 덜 새는 곳을 ‘소녀’에게 양보하는 모습, 수숫단을 열심히 나르는 모습, ‘소녀’를 업고 도랑을 건너는 모습. 한 번도 사랑이라는 단어가 나오지는 않지만 우리는 모두 ‘소년’이 ‘소녀’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절제의 미학이 이 소설의 묘미라고 생각하는데요, 자신보다 소중한 사람이 생겨 그 사람을 위해 기꺼이 그리고 묵묵히 고통을 감내하는 ‘소년’의 모습에서 우리는 깊은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 어떤 달콤한 말보다 말이죠. ‘소녀’ 또한 ‘소년’이 자신을 위해 애쓰는 모습을 보며 자신의 사랑을 드러내 보입니다. 이리저리 뛰어다니느라 ‘소년’에게 땀 냄새가 많이 났지만 ‘소녀’는 오히려 그의 온기에 따뜻함을 느낍니다. ‘소녀’ 또한 행동으로 자신의 사랑을 증명하고 있는 셈이죠. 사실 사랑이라는 게 뭐 별거 있나요. 한여름에 땀 뻘뻘 흘리면서도 서로 껴안고 있을 수 있으면 그게 사랑 아닌가요. 우리의 몸은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까요. 말로는 사랑한다고 하면서 상대방의 땀 냄새는 싫다? 아마 그것은 거짓말일 겁니다. ‘소녀’가 보여주고 있듯이 말이죠.
그날 이후 ‘소녀’는 한동안 보이지 않았습니다. ‘소년’은 그리운 마음에 조약돌을 만지작거리기만 했습니다. 어느 날 ‘소녀’가 개울둑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고 ‘소년’은 다가갑니다. 아파서 그동안 못 나왔다며 ‘소녀’가 대추 하나를 건넵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스웨터 앞자락에 검붉은 진흙 물이 들었다며 업힐 때 ‘소년’의 등에서 옮은 것 같다고 말합니다. ‘소년’은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는지 얼굴이 확 달아오릅니다. 그런 ‘소년’의 모습을 보며 ‘소녀’는 싫지만, 곧 이사를 가게 될 것 같다고 말합니다. 그 말을 들은 ‘소년’은 자기가 씹고 있는 대추알의 단맛도 못 느낄 정도로 충격을 받습니다.
‘소년’은 ‘소녀’가 이사 가기 전에 덕쇠 할아버지네 호두 맛을 보여줘야겠다고 생각합니다. 동네에서 제일가는 맛있는 호두이기도 했지만, 자신의 마음을 어떻게든 표현하려는 거였겠죠. 그렇게 ‘소년’은 덕쇠 할아버지네 호두밭에 가서 도둑질을 합니다. 선량한 사람도 도둑질하게 만드는 사랑의 놀라운 힘이죠.
그러나 결국 호두도 주지 못하고 ‘소년’은 안타까운 소식을 듣게 됩니다. 소녀네가 내일 양평읍으로 이사를 간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날 밤 누워서 내일 소녀네를 찾아가 볼까 말까 하던 중 부모님이 하는 말을 어쩌다 듣게 되면서 이 소설은 끝이 나게 됩니다. “어쩌믄 그렇게 자식 복이 없을까. 그런데 참 이번 기집애는 어린 것이 여간 잔망스럽지가 않어. 글쎄, 죽기 전에 이런 말을 했다지 않어? 자기가 죽거든 자기 입던 옷을 꼭 그대로 입혀서 묻어 달라구......”
소나기가 어느새 뚝 그치듯 너무도 짧게 끝나버린 사랑이지만 아직까지도 우리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고 있는 것을 보면, 두 사람의 사랑은 영원한 사랑이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사랑의 영원성은 사실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 강도의 문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마치 꽃 피우는 것처럼요. 사랑은 꽃을 피우느냐 못 피우느냐의 문제이지 그 꽃이 얼마만큼 피어있느냐의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정말 슬픈 것은 꽃이 금방 져버리는 것이 아니라 한 번도 꽃을 피우지 못했다는 사실 아닐까요. 남들처럼 손도 잡고 데이트도 했지만 한 번도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고, 한 번도 제대로 꽃피우지 못한 사람들도 너무나 많으니까요. 비록 꽃이 지더라도 제대로 활짝 폈던 경험, 강렬하게 온몸으로 사랑했던 기억이 가슴 한 켠에 영원토록 남아있다면, 그것이 영원한 사랑이 되는 게 아닐까요? 그러니 일주일을 사랑했어도 그 사랑은 영원한 사랑이 될 수 있는 겁니다. 소나기처럼 짧게 그쳐버렸지만 마음속에 영원토록 잊지 못할 예쁜 사랑의 기억으로 남은 어느 산골 소년의 사랑처럼 말이죠. 오늘의 국어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내용이 재밌고 도움이 되셨다면 구독과 좋아요 부탁드립니다. 시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안녕하세요. '어쨌든 국어'입니다.
'국어가 유익하면서도 흥미로울 수는 없을까?'
저희 채널은 이런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고민에서 시작합니다.
* 목차
1. 소나기 같은 사랑
2. 줄거리
3. 영원한 사랑
* BGM
1. Present – Ikson
2. Walk - Ikson
3. Terminal D – Silent Partner
4. 어느 산골 소년의 사랑 이야기(예민) 커버 곡 – Sangeo of Music
: https://www.youtube.com/watch?v=w41Ktd5PWcs
#황순원 #소나기 #국민단편소설 #문학 #순수 #클래식 #사랑 #소나기는그쳤나요 #어느산골소년의사랑이야기 #TV문학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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