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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한용운이 꿈꿨던 불교

영원한 현재 2021. 8. 22. 11:10

https://youtu.be/589Uh0La_wU

 

  우리는 전편에서 민족투사로서의 모습과 한 남자로서의 모습, 시인으로서의 모습을 살펴봤습니다. 그러나 ‘한용운’의 근본은 역시나 불자, 승려입니다. ‘한용운’의 문학 연구를 주도했던 서울대 ‘송욱’ 명예교수님은 <님의 침묵>을 <팔만대장경>이라고 말합니다. 심오한 불교 사상을 예술적으로 승화시켰다는 것이죠.

 

“매우 깊고 넓은 불교 철학, 즉 팔만대장경에 실려 있는 내용을 누구나 읽을 수 있는 한국말로 그리고 시라는 형식을 통해서 풀이하고 결정시킨 것이 이 시집이다.”
                                                                                                                                       - 송욱

오늘은 승려로서 ‘한용운’의 모습을 통해 이 문제의 답이 왜 3번, 부처인지 설득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한용운’은 어릴 적부터 아버지에게 아침저녁으로 국가와 사회를 위해 몸을 바친 위인, 열사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왔습니다. 18세까지 한학을 공부했는데, 을미사변과 을미의병 등을 겪으면서 나라와 민족에 대해 고민하다가 무작정 한양으로 발길을 옮깁니다. 당시 부인 ‘전정숙’이 임신 중이었는데 갑자기 진통이 와서 ‘한용운’에게 아이가 나올 것 같으니 미역을 좀 사 오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용운’은 시장으로 가지 않고 그 길로 가출해버립니다. 이렇게 매정할 수가 있나요? 아무튼 무작정 집을 나왔지만 ‘한용운’은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발길을 돌려 이름난 스님을 찾으러 오대산의 월정사로 갑니다. 인생의 궁극적인 문제를 먼저 해결해보고자 했던 것이죠. 그러나 유명한 그 스님은 만나지 못하고 백담사의 연곡 스님 아래서 불교 경전을 공부하게 됩니다. 이때가 1904년, 나이로는 스물여섯 살 때입니다. 오세암에서 일 년 만에 <팔만대장경>을 독파했다고 하는데, 이게 사실 엄청난 겁니다. <팔만대장경>은 양쪽 판에 모두 글이 적혀있기 때문에 총 약 17만 판 정도가 되는데, 한 판을 번역하면 A4로 10장 정도가 나온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 170만 쪽에 달하는 <팔만대장경>을 일 년 만에 읽었다는 것인데요, 계산해보면 쉬지 않고 매일 하루에 5000페이지 정도를 읽어야 하는 양입니다. 명석한 두뇌도 두뇌지만, 엄청난 정열의 소유자였던 것 같습니다. 1908년 5월에는 일본 유학도 가서 도쿄 조동종대학에서 불교와 서양철학도 공부했다고 하는데, 그때 ‘최린’을 만났다고 합니다.

 

  단재 ‘신채호’는 <낭객의 신년만필>이라는 글에서

 

우리 조선은 석가가 들어오면 조선의 석가가 되지 않고, 석가의 조선이 되며, 공자가 들어오면 조선의 공자가 되지 않고 공자의 조선이 되며, 주의가 들어와도 조선의 주의가 되지 않고 주의의 조선이 되려 한다.
                                                                                                    - 단재 신채호, <낭객의 신년만필>

라고 말했는데요, 그래서 ‘한용운’은 조선의 불교, 더 나아가서는 ‘한용운’의 불교를 세우고자 했습니다. ‘한용운’은 먼저 호국불교의 전통을 회복하고 계승하려고 했습니다. 산사에 틀어박혀 경전을 암송하는 불교가 아니라 백성들 사이에서 호흡하는 불교, 백성을 위하고 나라를 구하는 불교를 만들고자 했습니다. 우선 당시 일본의 불교 친일화를 저지하기 위해 승려 결기대회를 열어 한일 불교 동맹 조약 체결을 저지하고자 했습니다. 당시 많은 스님들이 점점 친일화되어 가고 있었는데 ‘만해’는 그러한 스님들을 강하게 꾸짖었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더러운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침묵) 그러면 내가 자문자답을 할 수밖에 없군요. 제일 더러운 것은 똥이라고 하겠지요. 그런데 똥보다 더 더러운 것은 무엇일까요? (침묵) 그러면 내가 또 말하지요. 나의 경험으로는 송장 썩는 것이 똥보다 더 더럽더군요. 왜 그러냐 하면 똥 옆에서는 음식을 먹을 수가 있어도 송장 썩는 옆에서는 그 냄새가 역하여 차마 먹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송장보다도 더 더러운 것이 있으니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호통치며) 그건 31 본사 주지 네놈들이다.”

또 1918년 불교 잡지 <유심>을 창간하여 불교 관련된 글을 실었는데, 주로 민족 독립 정신이 담긴 내용의 글을 실었습니다. 

 

  ‘한용운’은 또한 불교의 대중화를 위해 힘썼습니다. 앞서 말했던 <팔만대장경>을 일반인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핵심만 요약, 정리해서 <불교대전>을 편찬했습니다. <님의 침묵>도 그런 차원에서 ‘누구나 읽을 수 있는 <팔만대장경>’으로 만든 것이구요. 1931년에 인수한 불교 잡지 <불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는 조선 불교 중앙 교무원의 기관지 형태를 띠었지만, 나중에는 거의 ‘한용운’의 개인잡지처럼 발행되어 대중 불교를 힘주어 주장하는 여러 논설들이 실렸습니다. <조선불교의 개혁안>이라는 글에서 ‘한용운’은 

 

“산간에서 가두로, 승려로서 대중에’가 현금 불교의 슬로건이 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 그리하여 그들은 지옥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지옥에 들어가며, 아귀를 제도하기 위하여 아귀도에 들어가며, 일체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고해화택에 침륜생사하느니 어찌 거룩하지 않으리요. 그러므로 대중을 떠나서 불교를 행할 수 없고, 불교를 떠나 대중을 제도할 수 없는 것이다.”

라고 말했는데요, 이처럼 ‘만해’는 ‘원효’처럼 저잣거리에서 백성들과 살 부딪히며, 함께 울고 함께 우는 그런 불교를 만들고자 했습니다. 그의 그러한 생각들은 사실 1913년에 지은 <조선불교유신론>에 이미 다 담겨있었습니다. ‘만해’ 사상의 결정체라고도 볼 수 있는 이 책은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지금의 불교를 완전히 새롭게 바꿔보자는 혁명적인 논문이었습니다. 

 

“당시 가장 선구적이고 혁명적인 논문”
                          - 불교학자, 서경수

그는 “유신이란 무엇인가, 파괴의 아들이요. 파괴란 무엇인가, 유신의 어머니다.”라며 당시 불교의 폐단을 지적하고 뜯어 고치고자 했습니다. 창조는 항상 파괴를 전제해야 하니까요. 몇 가지만 살펴보자면, 우선 염불당을 너무 시끄럽다며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대개 지극한 이치는 말이 필요 없다면서 말이죠. 그리고 적극적으로 포교를 해야 한다면서 사원을 큰 도시 안에 짓자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모든 승려는 반드시 결혼하여 아내와 남편을 가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부분이 가장 문제가 됐었는데요, 왜냐면 당시 불교에는 ‘남근을 여인의 음부에 넣으려면 차라리 독사의 입에 넣어라’라는 말이 있었을 정도로 남녀의 성관계를 금기시했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만해’는 오히려 지금처럼 금기시하면 할수록 승려의 파계와 범죄가 속출할 것이기 때문에 차라리 결혼을 시켜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대처승으로서의 자신을 합리화하기 위해서였는지, 정말 조선의 불교를 위해서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한용운’은 무리수를 던집니다. 통감부에 건의서를 제출하면서까지 어떻게든 이를 관철시켜보려고 했는데요, 이는 훗날 많은 비판의 대상이 됩니다. 아무리 대의명분이 있다고 하더라도 일제의 힘을 빌리려고 했던 것이니까요.

 

  ‘한용운’의 불교는 사상적으로는 ‘불교 사회주의’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이에 대한 책을 집필한 것은 아니지만, <삼천리> 잡지 기자와의 문답에서 분명히 이를 밝혔고, 사실 평등주의를 근본으로 하는 불교가 사회주의와 연결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불교는 교리 자체에 평등주의, 비사유주의 즉 사회주의의 소질을 구비하고 있다”                                                                                                                       - 세계종교계의 회고

다툼도 없고 지배와 피지배도 없으며 모두 아우르고 어루만지는 어머니 보살의 모습, 사랑으로 중생을 구제하는 극락정토를 현실 사회에서 구현한다면 그것은 사회주의가 될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여기까지 ‘한용운’의 승려로서의 모습과 그가 꿈꿨던 불교에 대해 살펴봤는데요, 그럼 이제 왜 이 문제의 답이 3번인지 아시겠죠? 3편에 걸쳐서 ‘한용운’이라는 사람에 대해 좀 이해해 보는 시간을 가졌는데요, 마지막으로 ‘조지훈’ 시인의 말로 그의 삶을 요약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혁명가와 선승과 시인의 일체화-이것이 선생의 진면목이요, 선생이 지닌 바 이 세 가지 성격은 마치 정삼각형 같아서 어느 것이나 다 다른 양자를 저변으로 한 정점을 이루었으니, 그것들은 각기 독립한 면에서도 후세의 전범이 되었던 것이다.”
                                                                                                   - 조지훈, <민족주의자 한용운>

오늘의 국어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오늘의 영상은 ‘김삼웅’의 <만해 한용운 평전>을 참고해 만들었습니다. 내용이 재밌고 도움이 되셨다면, 구독과 좋아요 부탁드립니다. 시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안녕하세요. '어쨌든 국어'입니다.

'국어가 유익하면서도 흥미로울 수는 없을까?'

저희 채널은 이런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고민에서 시작합니다.

 

* 목차

1. ‘님’은 누구인가?

2. 불교에 귀의하게 되는 과정

3. 한용운의 불교

4. 호국불교

5. 대중불교

6. 불교 사회주의

7. 한용운의 삶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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