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용운의 그녀, '님'의 정체는?
개인적으로 우리나라 최고의 연애시집은 <님의 침묵>이 아닌가 싶습니다. 사랑이 갖는 역설적인 측면을 누구보다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는 시집이니까요. 사랑만큼 모순적인 게 또 있을까요? 나 자신이 철저하게 파괴되고 타들어 가면서도 묘한 행복함을 느끼는 게 사랑이니까요. 이 정도 깊이의 성찰은 결코 사랑을 해보지 않았다면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 문제의 답이 2번, 애인이라고 주장해보고자 합니다. 아직 전편을 보고 오지 않으셨다면, 보고 오시면 도움이 되실 거라 생각합니다.
‘고은’ 시인은 <한용운 평전>에서 ‘님’을 ‘여연화’라는 미모의 보살이라고 주장합니다. ‘여연화’는 속초에서 사는 부유한 선주의 아내인데요, 남편이 해난 사고로 사망하여 기일 날 법회를 열게 됩니다. 그때 다른 스님들과는 달리 쌀쌀한 ‘한용운’에게 마음이 쏠렸습니다. ‘만해’ 또한 그녀의 아름다움에 끌려 자주 만나며 연을 맺었는데, 속초 바닷가에 있는 집에 초청을 받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이후에는 <불교대전>을 편찬할 때 금전적으로 도움도 받았고, 옥살이할 때 면회도 자주 왔다고 합니다. 출옥 후에도 ‘만해’가 선학원에 있을 때 ‘여연화’가 자주 왕래를 했다고 당시 선학원의 스님들은 회고하고 있습니다. ‘만해’를 시봉한 상좌 ‘이춘성’ 스님의 증언에 따르면 ‘여연화’는 ‘만해’가 3.1운동 이후 신흥사, 백담사, 오세암 등에 내려와 휴식을 취할 때 항상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고 합니다. 오세암에서 <십현담주해>를 쓸 때는 지극정성으로 와서 시봉을 했고, 백담사에 있을 때는 객실에서 거의 살다시피 했습니다. <님의 침묵>을 집필할 무렵 신흥사에 있을 때는 아예 동거를 했기 때문에 오랫동안 승가에서는 ‘님’이 ‘여연화’라는 풍문이 돌았습니다. 알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죠. <십현담주해>, <님의 침묵> 두 권의 책을 쓸 때 ‘한용운’의 곁에 ‘여연화’가 있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어쩌면 <십현담주해>는 ‘여연화’로부터 발생한 마음의 동요를 가라앉히려는 발버둥이 아니었을까요? 불자로서 모든 것을 사랑하는 자비심을 갖기 위해서는 특정한 누군가를 사랑해서는 안 되니까요. 하지만 결국 ‘한용운’은 ‘여연화’에 대한 마음을 긍정해 버린 것 같습니다. <님의 침묵>이 그 증거죠. 그렇다고 해서 ‘만해’가 승려로서 자신의 삶을 부정했던 것은 아닙니다. 역설적이게도 오히려 그러한 긍정이 그에게 인류에 대한 사랑, 즉 자비로 나아갈 수 있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내 앞의 한 여자도 사랑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겠어요? 그렇기 때문에 ‘님’이 ‘여연화’라고 하더라도 승려로서 ‘한용운’에게 전혀 흠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사랑에서 자비로 한 걸음 더 나아가게 되죠.
<님의 침묵> 맨 앞에는 ‘군말’이라는 게 있습니다. 말 그대로 ‘군더더기 말’인데요, 많은 연구자들은 이 부분을 보고 <님의 침묵>을 단순히 이별의 연가로 보기는 어렵다고 말합니다.
‘님’만이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 중생이 석가의 님이라면 철학은 칸트의 님이다. 장미화의 님이 봄비라면 마치니의 님은 이태리다. 님은 내가 사랑할 뿐 아니라 나를 사랑하느니라.
- 한용운, <군말>
그런데 저는 이 부분을 읽고 오히려 ‘님’이 ‘여연화’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혹시 여러분도 느낌 확 오시나요? 왜 굳이 ‘만해’가 ‘군말’을 덧붙여서 이런 말을 했을까요? 저는 ‘군말’을 읽으면서 이런 느낌이 들었습니다. “야, 너 어제 왜 안 왔냐? 여자 만났지?” 이렇게 친구가 추궁하니까, “응, 여자 만났지. 근데 우리 엄마도 여자고, 할머니도 여자야.”라고 말하는 것처럼요. ‘님(여연화)만이 님이 아니다’라는 말에서 우리는 ‘한용운’의 조바심을 읽어낼 수 있습니다. 물론 ‘한용운’은 <님의 침묵>을 통해 ‘여연화’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인정했지만 주변의 시선을 의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승려였으니까요. 분명 이를 가지고 민족 지도자를 자처했던 자신을 폄하하려는 사람들이 나올 것이었기 때문에 ‘한용운’은 급하게 ‘군말’을 덧붙인 것 아닐까요? ‘님’을 사람들이 ‘여연화’라고 의심할 것이 걱정되었던 ‘한용운’은 그렇게 서둘러 그 대상을 ‘중생, 철학, 봄비, 이태리’로 확장시켜버립니다.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의심에서 벗어나려는 시도 자체가 그 사실을 인정하는 꼴이 돼버렸습니다. 정말로 ‘님’이 ‘여연화’가 아니었다면, 굳이 ‘군말’을 써서 의심을 해소하려고 하지도 않았을 테니까요. 거짓말은 항상 군더더기처럼 주저리주저리 덧붙여지기 마련 아니겠어요?
그리고 제가 <님의 침묵>을 샅샅이 뒤져 ‘님’이 누군지 드디어 밝혀냈습니다. <님의 침묵> 총 92편 중에 ‘님’의 음성이 나오는 유일한 시가 있는데요, ‘사랑의 끝판’이라는 시입니다.
님은 나를 게으르다고 꾸짖습니다. 에그 저것 좀 보아. “바쁜 것이 게으른 것이다”하시네.
내가 님의 꾸지람을 듣기로 무엇에 싫겠습니까.
- 한용운, <사랑의 끝판>
여러분은 여기서 님이 ‘조국’이나 ‘민족’ 혹은 ‘부처님’으로 느껴지나요? 저는 자꾸 게으른 남편을 꾸짖는 아내의 모습이 떠오르는데 저만의 착각인가요? ‘님’의 음성은 역시나 ‘만해’와 동거하며 집안일을 돕고 그를 시봉했던 ‘여연화’의 목소리가 아니었을까요? 이 시를 발견했을 때 드디어 님의 정체를 밝혔다며 굉장히 뿌듯했는데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너무 지나친 해석인가요?
그러나 여전히 ‘한용운’의 ‘님’을 ‘민족’이나 ‘조국’으로 해석하려는 경향이 강하게 남아있습니다. 전편에서도 봤듯이 독립운동가로서의 임팩트가 너무나 강했던 탓이겠죠. 그리고 암울했던 식민지 시대이기에 ‘님’을 ‘잃어버린 조국’을 표상한다고 하는 것이 우리에게 큰 위안을 주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런 민족주의적인 효용 차원이라면 이해하겠지만 이것이 예술로서, 시라는 문학을 대하는 바람직한 태도는 아닙니다. 아무리 식민지 시대라고는 하지만 그 기간 동안에는 그럼 꽃을 꽃 자체로 노래할 수 없다는 건가요? 여인을 여인 자체로 시로써 사랑하고 노래하면 안 되는 건가요? 일제강점기에 쓰인 시에 나오는 ‘눈보라’와 ‘겨울’이 전부 ‘일제의 시련’이라고 하는 것은 분단의 상황인 지금 나오는 시의 ‘비바람’을 모두 ‘분단의 비극’이라고 보는 것과 같은 것 아닐까요? ‘님’을 ‘민족’이라고 한정 짓는 것만큼 ‘한용운’의 문학과 사상을 편협하게 만드는 일은 없습니다. ‘님’을 그냥 순수한 그 ‘님’(여연화)으로 이해해도 괜찮지 않을까요? 그렇다고 그것이 민족투사로서나 승려로서 ‘한용운’의 명예를 그렇게나 실추시키는 일인가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민족주의 관념에 사로잡혀 시의 모든 상징물을 시대나 민족과 결부시키려는 것은 인간의 삶을 지나치게 거칠게 재단하고 또 왜곡하는 일입니다. 애인이 죽었다고 그 사람이 쓴 시가 모두 그 애인을 향해있어야만 하는 건 아닙니다. 그 사람에게도 어느 틈에는 푸른 하늘이 깃들기 마련이고, 또 살다 보면 기쁨을 누리기 마련이니까요. 실연을 당했어도 그런 것들을 충분히 시로써 노래할 수 있는 것 아닐까요? 오늘의 국어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오늘의 영상은 ‘고은’ 시인의 <한용운 평전>을 참고해 만들었습니다. 내일의 국어 이야기는 승려로서의 ‘한용운’에 대해 살펴보는 시간이 되겠습니다. 내용이 재밌고 도움이 되셨다면 구독과 좋아요 부탁드립니다. 시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안녕하세요. '어쨌든 국어'입니다.
'국어가 유익하면서도 흥미로울 수는 없을까?'
저희 채널은 이런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고민에서 시작합니다.
* 목차
1. '님의 침묵'에서 ‘님’은 누구인가?
2. ‘님’은 미모의 보살, ‘여연화’
3. ‘한용운’이 ‘군말’을 급하게 덧붙인 이유
4. <사랑의 끝판>에서 ‘님’의 음성
5. ‘님’을 ‘민족’으로 해석하는 것에 대한 비판
- 예술로서 시를 대하는 바람직한 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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