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용운, 태산 같은 민족의 지도자
여러분 ‘한용운’의 ‘님의 침묵’ 다 아시죠? 문제 하나 내겠습니다. 네. 정답은 1번, 민족이죠. ‘민족주의자 한용운’이라는 글에서 ‘조지훈’ 시인이 말했듯이, ‘한용운’의 ‘님’은 그 누구도 아닌 ‘민족’입니다. ‘네? 문학에 정답이 어딨냐구요? 해석하기 나름 아니냐구요? 이런 말씀 드리기 죄송스럽지만, 문학에도 정답이 있습니다. 물론 그 정답이 하나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여러 개가 정답이 될 수도 있고, 또 그중에서도 더 타당한 정답, 덜 타당한 정답이 있죠. 오답도 있구요. 물론 수학이나 과학처럼 이것을 결정하는 절대적인 기준은 없습니다. 우리들이 합의를 봐야 하는 문제입니다. 결국 설득력 싸움이죠. 어떤 설명이 더 그럴듯한지, 어떤 관점이 더 많은 사람에게 공감을 얻는지의 문제입니다. 문학에서 시대와 공간을 초월하는 절대적 진리는 없습니다. 시대에 따라 지역에 따라 천차만별로 이해되는 것이 바로 문학이기 때문입니다. 조선 시대 때 <춘향전>의 의미와 지금의 의미, 그리고 100년 뒤의 의미가 과연 같을까요? 또한 서양에서 <춘향전>을 과연 우리와 똑같이 받아들일까요? 그렇습니다. 문학에서의 정답은 결국 얼마만큼 그것을 향유하는 공동체 구성원들이 인정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그럼 왜 학교에서는 문학에 대한 해석을 어느 하나로 고정하느냐구요? 사실 교과서나 참고서의 해설들 또한 어느 한 연구자의 견해일 뿐입니다. 다만 그 설명이 굉장히 설득력 있어 많은 사람의 공감을 얻었기 때문에 그렇게 가르치는 것이죠. 하지만 이것도 100년 뒤, 200년 뒤에는 또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지금까지 나오지 않았던 귀중한 자료가 발견돼 지금의 해석을 완전히 뒤집는 새로운 관점이 나올지도 모르니까요. 만약 그것이 더 많은 사람의 공감을 얻는다면, 그것이 더 타당한 정답이 되겠죠. 그런 식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문학에서의 해석은 결국 얼마만큼 신뢰할 수 있는 근거들을 가지고 일관되게 그리고 정합적으로 그것을 설명하고 있는지를 살펴봐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3.1운동과 신간회 활동을 중심으로 독립운동가로서의 ’한용운‘의 모습을 살펴보면서 이 문제의 정답이 왜 1번인지 설득해보는 시간이 되겠습니다.
만해 ‘한용운’은 3.1운동 <기미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 대표 33인 중 한 명입니다. 그러나 ‘만해’는 단순히 서명만 했다거나 수동적으로 선출된 사람이 아닙니다. 최일선에서 3.1운동을 계획하고 추동했던 인물입니다. 천도교의 ‘최린’과 의견을 나누면서 천도교 측에서 계획하고 있던 독립선언에 동참하기로 하고 불교계 스님들을 찾으러 다녔고 불교계 쪽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는 책임을 맡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1919년 3월 1일, 경찰과 헌병 60여 명이 포위한 가운데 태화관에서 대표로 연설을 합니다.
오늘의 이 모임은 곧 독립 만세를 고창하여 독립을 쟁취하자는 취지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앞장서고 민중이 뒤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명을 바쳐 자주독립국이 될 것을 기약하고자 여기 모인 것이니 정정당당히 최후의 1인까지 독립쟁취를 위해 싸웁시다. 여러분, 지금 우리는 민족을 대표해서 한자리에 모여 독립을 선언했습니다. 정말로 기쁘기가 한이 없습니다. 이제는 죽어도 한이 없습니다. 그러면 다 함께 독립 만세를 부릅시다.
그리고선 당당히 서대문 형무소에 감금됩니다. 참고로 태화관은 중국집인데요, ‘이완용’이 살았던 집을 수리해 만든 곳입니다. 이곳은 을사늑약을 모의하던 장소였고, 고종황제를 퇴위시키고 순종 황제를 즉위케 한 음모도 여기서 이루어졌습니다. 합병조약 준비도 바로 이곳에서 모의되었죠. 민족대표들은 친일파들이 조선을 팔아넘긴 그 장소에서 독립선언을 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당시 ‘독립 선언’이냐 ‘독립 청원’이냐를 두고 민족지도자들 사이에서도 논란이 있었는데요. ‘만해’는 처음부터 “침략주의에 대한 약소민족의 해방 투쟁인데 청원에 의한 타의의 독립운동이 웬 말이냐.”라며 완강하게 독립선언을 주장했습니다. ‘김수영’의 <육법전서와 혁명>이라는 시가 떠오르네요.
기성 육법전서를 기준으로 하고
혁명을 바라는 자는 바보다
혁명이란
방법부터가 혁명적이어야 할 터인데
이게 도대체 무슨 개수작이냐
- 김수영, <육법전서와 혁명>
그리고 ‘만해’는 기미독립선언서를 3.1운동의 직접 책임자도 아닌 ‘최남선’에게 맡긴다는 것은 가당치도 않다며 자신이 맡겠다고 나섰지만, ‘최린’의 반대로 결국 ‘최남선’이 기초해온 선언서에 공약 삼 장을 덧붙이는 것으로 그쳤습니다. ‘고은’ 시인에 따르면 ‘만해’가 당시 천재였던 ‘최남선’에 대한 문학적 열등감 때문에 그랬다고 하는데, 어찌 됐든 만해는 고집스럽게 공약 삼 장을 덧붙이며 기미독립선언서를 마무리합니다.
일. 오늘 우리들의 거사는 정의, 인도, 생존, 존영을 위하는 민족적 요구이니 오직 자유적 정신을 발휘할 것이오, 결코 배타적 감정으로 일주하지 말라.
일. 최후의 한 사람까지 최후의 시각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쾌히 발표하라.
일. 일체의 행동은 가장 질서를 존중하여 우리들의 주장과 태도로 하여금 어디까지든지 광명정대하게 하라.
사실 기미독립선언서 중에서도 가장 문제가 됐던 부분이 바로 이 공약 삼 장 부분이었습니다. 일본은 이 공약 삼 장을 근거로 민족대표를 내란죄로 몰아갔습니다. 두 번째 장의 내용을 가지고 폭동을 일으키려고 했던 것 아니냐고 집요하게 추궁했습니다. 민족대표들은 총칼을 다 빼앗겨 무력이 없는 사람들이 어찌 폭동을 일으킬 수 있겠냐며 맞섰지만, 일본 검사와 판사는 한통속이 되어 내란죄로 사형을 선고하려고 했습니다. 실제로 사형선고가 내려질 것이라는 이야기가 돌자 일부 인사들은 불안에 떨며 울먹거렸는데 이때 ‘만해’가 똥통을 집어 던지며 호통을 쳤다고 합니다. “이 비겁한 인간들아, 울기는 왜 우느냐! 나라 잃고 죽는 것이 무엇이 슬프냐! 이것이 소위 <독립선언서>에 서명했다는 민족 대표의 모습이냐!” 이 일화에서도 알 수 있듯이 ‘만해’는 그러한 일본의 겁박에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조선독립이유서>를 작성해 조선의 독립을 부인하는 것은 세계 평화를 교란하는 일로서 세계전쟁을 유발하게 될지도 모른다며 일본을 협박했습니다. 그리고 심문 과정에서도 자신은 끝까지 독립운동을 할 것이고, 만일 죽어 몸이 없어진다고 하더라도 정신만이라도 영세토록 가지고 있을 것이라며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참회서를 쓰면 석방시켜주겠다는 제의를 끝까지 거절하면서 3년간의 옥살이를 태산같이 버텨냈습니다. 당시 형무관들도 그 절개와 기개를 무서워하며 또 존경하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저 고추 같은 중을 당할 사람은 없다. 이 형무소가 생긴 이래 저런 괴수가 있었던 일이 없다. 한용운은 능히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천하를 뒤흔들고 있다.”
그렇게 옥살이를 하고도 ‘만해’는 또 나와서 독립운동을 이어갑니다. 당시 ‘이광수’, ‘최남선’ 등의 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이 자치 운동을 펼쳤는데요, 이에 반발하여 ‘신간회’가 만들어집니다. ‘만해’는 ‘신간회’ 발기인으로 참여하며 또 한 번 독립운동에 뛰어드는데요, ‘신간회’는 다들 아시다시피 ‘민족단일당 민족협동전선’이라는 표어 아래 민족주의계와 사회주의계가 합작하여 만든 최대 규모의 항일 단체입니다. 149개의 지회를 갖고 회원이 4만여 명에 달했던 ‘신간회’에서 ‘만해’는 중앙집행위원과 경성지회 회장을 맡으며 최전선에서 독립운동을 이끌어갑니다. ‘한용운’의 반일 감정을 잘 보여주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는데요, ‘신간회’ 지회장 일을 할 때입니다. 자신에게 온 편지 봉투에 일본의 연호인 ‘소화’라는 단어가 적혀있는 걸 보고 곧바로 아궁이 속에다 집어넣고 불을 질러버렸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혼잣말로 “소화(韶和)를 소화(燒火)해 버리니 시원하군.” 하며 아재 개그를 날렸다고 하는데요, 그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1929년 11월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나자 ‘신간회’는 조사단을 파견하고 이를 확산시키기 위해 민중대회를 열고자 계획하는데요, 이때 ‘만해’가 이 민중대회 추진을 주도했으며 연사로도 나섭니다. 민중대회 하루 전날 ‘한용운’을 비롯한 핵심 간부들이 구속되면서 좌절되었는데, 이 소식이 널리 알려지면서 오히려 학생운동이 급속히 확산되었습니다. ‘신간회’는 곧 일제의 탄압과 민족주의 세력과 결별하고 독자 노선을 추구하라는 코민테른의 지령으로 인해 해체 위기에 처합니다. ‘만해’는 ‘해소론’을 비판하며 끝까지 ‘신간회’를 지키려고 했지만 결국 1931년 5월에 ‘신간회’는 해체되고 맙니다.
이제 왜 이 문제의 정답이 1번인지 아시겠나요? 독립운동가로서의 ‘한용운’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조지훈’ 시인의 말처럼 ‘만해’에게 ‘님’은 우리 민족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는 머릿속에 온통 민족, 독립밖에 없었던 사람이었으니까요. 그는 역사상 유일하게 드러내놓고 독립운동을 하고 일제와 맞선 인물이었습니다. 정말 유일했습니다. 잔학했던 일제도 선사의 큰 인격 앞에서는 함부로 할 수 없었던 것이겠죠. 태산 같은 민족의 큰 어른으로서, 그리고 지도자로서 그는 10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에게 큰 울림을 주는 민족의 큰 종으로서 상징적 존재로 남아있습니다.
“만해는 작게 치면 작게 소리가 나지만 크게 치면 칠수록 큰 소리로 울리는 역사의 종, 민족의 종으로서의 상징적 존재가 아닐 수 없다.” - 김재홍
오늘의 국어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오늘의 영상은 김삼웅의 <만해 한용운 평전>을 참고해 만들었습니다. 내일의 국어 이야기는 한 남자로서의 ‘한용운’에 대해 살펴보는 시간이 되겠습니다. 내용이 재밌고 도움이 되셨다면 구독과 좋아요. 부탁드립니다. 마지막은 서대문 형무소에서 ‘만해’의 최후진술로 영상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시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들의 행동은 너희들의 치안유지법에 비추어 보면 하나의 죄가 성립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것일 뿐이다. …… 너희들이 강병과 힘을 자랑하고 있지만 수덕을 정치의 요체로 삼지 않을 경우에는 국제사회의 고립을 면치 못할 것이고, 마침내는 패망의 길이 멀지 않다는 것을 예언하여 둔다.”
안녕하세요. '어쨌든 국어'입니다.
'국어가 유익하면서도 흥미로울 수는 없을까?'
저희 채널은 이런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고민에서 시작합니다.
* 목차
1. <님의 침묵>에서 ‘님’은 누구인가?
2. 문학에서의 해석
3. 3.1운동을 추동한 ‘한용운’
- 태화관 대표 연설
- <기미독립선언서>의 공약 삼 장
- 형무소에서의 일화
4. ‘신간회’ 경성지회장으로서의 독립운동
- ‘소화(韶和)’ 일화
- 광주학생항일운동 민중대회 추진
- ‘해소론’ 반대
5. ‘민족’으로서의 ‘님’
6. 서대문 형무소에서의 최후진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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